개혁신학/인간론

인간의 상태에 따른 율법의 의미와 기능들의 구분

노가 없는 배 2020. 6. 16. 10:23

by 박동근 목사 (2000. 6. 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즉, 십계명은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위엄과 거룩과 선하심을 가진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특별 계시였습니다. 십계명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가 그의 명령과 교훈들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내가 이러한 존재이니 너희는 나의 속성에 합당하게 반응하여 이렇게 예배하고 섬겨야 하느니라”는 뜻이 담긴 계시인 것입니다.

이 율법은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첫 조상의 양심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락 후에 십계명이 성문법으로 주어지기 전에 이 법들이 인류의 양심에 동일하게 새겨져 있었습니다. 십계명이 돌 판에 새겨져 주어지기 전에 이미 인류는 살인이 죄인 것을 본성으로 양심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에 가인은 살인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정죄를 당했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속성의 위엄을 계시하고, 그를 어떻게 예배하고, 그 앞에 어떻게 살아가며 그를 섬겨야 하는지를 계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이처럼 시대를 초월한 율법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인간의 상태에 따라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동일한 율법이지만, 인간의 상태에 따라 율법의 역할도 인간의 반응도 차이를 갖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의 역할과 인간의 반응과 율법이 가져오는 결과들이 달라지는 이유는 “죄”와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각의 상태를 구분하여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은 다양한 측면에서 전체의 의미를 살펴야 오해가 없고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획일적이고 협소한 시각으로 성경 전체의 맥락을 잃은 채 율법을 접근하면 큰 혼란과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율법을 바로 이해해야 복음을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을 바로 이해해야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성경적으로 바르게 정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처럼 율법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이유는 이러한 율법의 다양한 측면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오늘 전하는 본문을 이해하는 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직접 살피기 전에 예비적인 접근을 먼저 하도록 하렵니다.

1. 타락 전

첫째, 인간이 타락하기 전,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법은 인간에게 짐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에게 순종은 버거운 짐이지만, 첫 조상에게 죄는 없었고, 하나님께서 첫 조상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는 거룩과 의와 거룩과 같은 원의라는 주셔서 이들의 영혼은 선하고 올바른 것을 향할 힘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이성과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순종하며 사모할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첫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진정 인간이 죄로부터 자유롭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선함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누리는 복된 수단이요, 행위 언약의 차원에서 보면, 약속된 생명을 누리는 수단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종할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순종할 마음과 순종할 의지가 충만한 자에게는 순종은 기쁨일 뿐입니다.

2. 타락 후

둘째, 인간이 타락한 후, 선한 율법이 인생에게는 저주가 되었습니다. 왜 율법이 죄인에게 저주가 됩니까? 율법은 선한 것이고 지극히 거룩한 것입니다.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신 영광만이 비추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율법이 저주가 됩니까? 문제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계시하며 그에게 합당한 예배와 삶을 요구할 때,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부합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선한 것과 정당한 것을 요구하지만, 인간은 율법의 요구에 전혀 반응할 수 없고 그런 요구들에 부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율법을 통해 요구하는 합당한 예배와 삶을 살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 되어 전적으로 타락하여 무능하기 그지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율법의 본성은 엄중히 선을 요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할 때 정죄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본성이기에 타락한 죄인에게 율법은 언제나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만족시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이 은혜를 붙들지 않고 불가능한 방식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어리석음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가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삶을 추구하는 바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살지 않는 자들을 책망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감사의 열매요 결과로서 순종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의를 얻으려고 하거나 율법을 구원의 조건과 공로로 삼는 일을 철저히 정죄합니다. 이런 행위 언약적인 구원 추구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복음의 길을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만족시킬 만한 능력이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행위 언약, 순종의 공로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큰 정죄와 저주만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해야 하고 그분의 용서와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성화조차도 불완전하니 성도가 의인됨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3. 중생 후

셋째, 하나님께 용서받고 거듭난 구원의 백성들에게 율법은 불신자와 또 다른 의미와 기능을 갖습니다. 성도에게 율법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역할하고 기능합니다. 성도에게 율법은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지를 분별하게 해 주어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수단이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성화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주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에게 은혜가 주어져 율법의 요구하는 길을 이제 걸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성도들 안에도 여전히 지배력을 잃은 죄가 내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전히 성도들도 죄 짓고 넘어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불완전한 행위라면 율법의 본성을 생각할 때 불신자와 동일하게 정죄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성은 완전한 것을 요구하고 엄중하게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율법은 원래 그렇습니다. 율법의 본성은 완전한 것이 아니면 다 정죄합니다. 철저히 그렇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죄를 지닌 모든 사람은 정죄의 대상이고 형벌의 대상인 것이고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성도들이 어떻게 율법을 좇아갈 수 있을까요? 성도에게 율법이 긍정적인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 한 이유로 말미암아 저주가 되는 율법을 성도들은 복의 수단, 은혜의 수단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은 본성대로 하면 그리스도인의 불완전한 순종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의 본성대로 하면 다 진노의 대상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성도들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율법의 본성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율법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신 그 본성대로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이 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본성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진 것입니다. 즉, 불신자들에게 율법은 그 본성대로만 요구하지만, 성도들에게는 이 율법의 본성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관용이 더해집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본성이 정죄할 그 죄책을 성도의 불완전한 순종에서 씻어내시고 용서하십니다. 성도들은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가 걷고 있는 지점에서의 불완전함 때문에 정죄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에게 율법은 지금 도달한 완전으로 주어지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 받으며 성령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그 날 도달할 목표로서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의 불완전한 선행도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로 덮혀 하나님께 받아들여집니다. 이와 같은 구속의 은혜 안에서 율법이 요구됨으로 율법의 본성은 변한 바가 없지만, 용서 안에서 다가갈 목표로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의미를 알고 부족한 가운데서도 늘 회개하며, 성령의 은혜를 의지해서, 불완전한 가운데서도 목표를 향해 순간순간 다가가는 신앙의 경주를 지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타락 전, 타락 후, 구원 받은 후에 동일한 율법이 어떻게 인간의 상태에 따라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지를 정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구분된 의미를 토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이 인간이 처한 각각의 상태에서 어떤 다양함을 가지고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각 상태에 따라 적절히 율법을 사용하셔서 구원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교회를 통해 선포하게 하시는 이유와 목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먼저, 교회는 불신자들을 회심시키기 위하여 율법을 성실히 선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중한 율법의 본성대로 율법을 선포하게 하여 죄인들이 자신의 비참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러한 율법의 역할은 “거울”의 역할과 비슷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잘 알지 못합니다. 잘 아는 것 같지만, 자신의 정체를 깨달을 만큼 지혜롭지 못합니다. 타락은 인간의 마음을 어리석고 우둔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고 자신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망의 길을 고집합니다. 바른 길을 그른 길로 오도하고, 그른 길을 바른 길처럼 추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방황하고 패역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율법의 본성대로 한 죄인을 정죄하게 하십니다. 율법이 선포될 때, 성령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장 선명한 거울로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정나라하게 보게 하시고, 누더기 같은 의로 걸친 자신의 수치를 보게 하십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죽음과 절망이란 병에 걸려 있는 소망 없는 자신의 정체를 발견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암흑 같은 마음에 율법을 선포하시고 깨닫게 하시므로, 하나님을 앞에서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 율법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 자는 먼저 절망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인 것을 깨달아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발버둥 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와 공로를 보이십니다. 극도로 가난해진 영혼, 율법의 거울 앞에 자신의 죄를 애통하는 영혼, 그리고 자신의 의가 걸레조각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겸손해 진 영혼은 성령의 은혜로 은혜를 붙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기 위해 엄중한 율법을 사용하십니다. 진정한 구원이 임하는 곳에 성경의 율법과 복음이 바르게 선포됩니다. 율법과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서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거듭남 그리고 회심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인식 없는 복음 신앙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분명한 제시 없이 율법만 선포될 때, 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지고 정죄 의식 속에서 병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성경은 율법과 복음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죄에 절망케 하여 오직 은혜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입니다. 성령께서는 이처럼 성경을 사용하셔서 율법과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므로, 죄인을 죄와 사망에서 불러내시어 건지십니다. 개혁 신앙은 이러한 율법의 용도를 율법의 신학적 용도, 제1 용도, 거울의 용도라고 불렀습니다. 성령께서는 아직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나 거듭난 신앙에 이르지 못한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제1용도로서 율법을 사용하십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가 아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율법을 여전히 선포하십니다. 성도들은 거듭난 자들입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의지의 능력이 회복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죄는 더 이상 성도의 영혼과 몸을 주관하지 못하고, 그들의 주인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도들 안에 죄의 지배력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배력을 잃은 죄가 그들 안에 남겨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불완전함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용서 안에서 날마다 죄와 투쟁하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십니다. 율법은 성화의 도상에, 성화의 투쟁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객관적으로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성령께서 구원의 배에 우리를 싣고 이끌어 가신다면, 율법은 성도들이 탄 배에 네비게이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알려주고, 성도들이 유혹을 받거나 죄를 범할 때, 그리로 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해줍니다. 혹여나 다윗처럼 죄에 넘어지면 율법은 성도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려줍니다. 성도들의 마음과 양심에 율법이 들려져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깨우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을 드러내시고, 예수님의 용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용서받으며, 성령의 은혜 공급을 통해 율법의 완전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용도를 제3용도, 곧 율법의 규범적 용도라고 부릅니다.

보편 사회에서 사람들의 죄를 억제하여 사회를 유지시키는 제2용도는 여기서 생략하겠지만, 위에 언급된 두 가지 율법의 용도를 통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 안에 택한 백성들을 이끌어 들이시고, 언약 백성 된 자들을 구원의 완성으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율법을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사용해 오셨고 또 지금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묵상하고 순종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공로를 쌓기 위해 순종하지 않고 받은 구원과 은혜에 감사를 올려드리는 방도로 순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