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언약 아래 있는 성도에 대한 율법의 의미와 적용
by 박동근 목사
종교개혁을 전후한 중대한 이슈는, 로마 카톨릭의 율법주위와 재세례파나 신령주의자들의 율법폐기론이란 두 극단이었다. 개혁신학자들은 이 두 극단을 배척하고 이신칭의의 진리를 제시하면서, 한편으로 은혜에 위배되지 않는 선행의 여지를 설명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통찰은 언약신학의 조망 속에서 칭의와 성화의 구분과 관계성을 설명하고, 성화의 은혜를 정립하므로 선행의 여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행의 여지는 율법의 적용 문제로 나아가 그 기능을 규명하는 데 있다. 이러한 성도를 향한 율법의 적용은 두 언약의 구분과 그에 따른 율법의 의미의 구분에 달려있다. 이 글은 이 처럼 이신득의 신앙을 전제로 공로주의를 배격하고, 또한 성도의 선행의 당위성 가운데 율법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설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는 언약신학의 조망 속에 칭의와 성화 그리고 선행, 율법의 관계를 규명하고 고찰을 필요로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앙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통해 주어지는 이중은총으로서 ‘성화’는 성도의 삶에 있어 ‘선행’의 여지(room)를 제공한다. 선행의 문제에 봉착할 때, 우리는 율법의 적용 문제로 논의를 진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신학은 성화의 외적 열매로서의 선행을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한 것만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율법을 온전한 의미로 성도의 삶에 적용하려 할 때, 행위언약 아래에서의 율법의 이해와 은혜언약 아래에서의 율법의 이해의 차이점을 이해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하나인 율법이 두 언약에 있어, 그 대상에 따라, 그 형식적, 시행적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야 할 내용은 두 언약의 구분에 따라 정의된 “율법의 세 가지 의미”와 “율법의 제3용도” 개념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율법의 세 가지 의미”를 언약의 두 구분 아래 설명하고, 또한 “율법의 제3용도”의 설명을 통해 율법이 어떤 의미에서 성도의 삶 속에 적용되고 성화적 의미에서 선행의 지침으로서 기능하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먼저 율법의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자.
율법의 세 가지 의미
성경은 율법에 관해 다양한 용어와 의미로 표현하고 있는데, 모든 율법은 세 가지 아래 포함된다. 그것은 행위의 법(the law of works), 믿음의 법(the law of faith)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the law of Christ)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신자의 삶의 규범”이란 말을 율법에 적용할 때, 이 세 가지 구분을 두 언약의 빛 아래 이해해야 율법주의(nominaism)나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의 두 극단적 오류에 빠져들지 않게 된다. “행위의 법”은 행위언약의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의 법은 행위언약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은혜언약 아래에서의 “믿음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과 대조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 간략한 언약의 설명과 함께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행위언약” 아래에서의 “행위의 법”으로서의 율법
“행위언약”과 “행위의 법”의 의미
행위언약이란 하나님과 인류의 머리와 대표로서 아담과 맺으신 첫 번째 언약이다.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완전하고 개인적인 순종에 의하여 구원을 약속 받았다. 행위언약의 내용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조건과 그것을 범했을 때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위협이다. 그러나 순종하였을 때에는 살리라는 생명의 약속이 제시된 언약이다(창2:17). 따라서 행위언약은 하나님의 명령과 조건을 행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요, 그렇지 못하면 사망에 이르는 언약인 것이다. 따라서 계명(율법)과 약속 그리고 위협으로 그 내용이 구성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행위언약으로서 한 율법을 주셨다. 타락 전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이러한 조건을 성취하고 명령을 순종할 능력도 부여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타락의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행위언약의 내용으로서 이 율법은 십계명과 동일하고, 도덕법과 동일하다. 그리고 은혜언약 아래 “그리스도의 율법”과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그 대상, 기능, 형식에 있어 구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이란 말을 사용하거나 적용할 때, 행위언약 아래에서 언급되는지, 은혜언약 아래에서 언급되는지를 구분해야 한다. 행위언약에서 율법의 의미는 “행위의 법”이 되는데, 이것을 행위언약 자체로 부르기보다는 행위언약의 내용으로 부른다. 그 이유는, “그것에 주어진 형식을 제외한다면 행위언약이라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요구하시고, 인간은 영생과 죽음의 조건 위에 완전한 순종을 산출 하도록 책임이 맡겨진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행위언약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십계명과 도덕법은 그 율법에 어떤 형식이 주어지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선악과 금지 명령이 모세 시대까지 기록되지 않았던 십계명 곧 도덕법과 동일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인간 본성에 심기우신 “자연법” 개념과 “선악과 금지 명령” 안에 내포된 율법의 내용들로 설명될 수 있다. 모세 시대까지 십계명은 돌 판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모세가 받은 율법과 동일한 법이 “인간의 마음속의 판”에 새겨져있었다. 십계명은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지혜,, 공의, 거룩과 일치하는 교리이며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안에서 그 자신의 본성을 묘사”하신다. 곧 십계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 계시하시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성요소가 지식, 의, 거룩인 바, 두 돌 판 곧 십계명은 역시 하나님의 지식, 의, 거룩을 지시하며, 그 피조물들과 백성들로 그에 합당한 응답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 요소들을 사람이 지니지 않았다면, 사람과 맺은 언약은 거룩한 하나님에게 일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하고, 선한 행위와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맺어진 언약은 거룩하고 순수하고 율법이 가슴에 새겨진 피조물을 통해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십계명의 개념과 내용은 “선악과 금지 명령”의 한 명령 안에 모두 내포되어있다.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율법의 내용을 실체적으로 포괄한다.” 곧 아담에게 주신 한 명령 안에 십계명의 모든 조항들이 반영되어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곧 불순종하므로, 하나님을 향한 첫 돌 판의 계명과 인간을 향한 두 번째 돌 판의 계명이 모두 범해졌다.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는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법을 범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본성과 의무에 역행한 행위였다. 그들의 가슴 속에 내포된 바 하나님의 율법이 선악과 명령에 대한 불순종을 통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창세기에 행위언약이란 말이 언급되지 않고, 아담 곧 피조물의 공식적인 인간 편의 동의가 있지 않으므로 언약의 본질적 요소들을 모두 구비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를 행위언약 곧 언약이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에 명시적으로 “행위언약”이란 용어가 언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완전한 순종에 대한 요구가 많이 기록되어있다. 예를 들면, 창 2:17의 하나님의 위협의 표명은 역으로 순종 시 생명의 약속도 내포하는 것이다. 곧 축어적인 표현으로 언약의 요소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더라도, 암시적인 의미로 이 언약의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심령에 진정한 각인과 피조물의 심경에 언약을 맺으신다. 이것이 최초에 사람과 언약을 맺으신 방식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이해의 정신을 주셨다. 따라서 인간은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으며, 시초의 인간은 그 의지에 있어서 올곧았다(전 3:29). 그리고 실행력 있는 재능과 능력, 그리고 그것에 의해 알려지고 의지된 선이 행해졌다. 곧 도구적 요소들은 규칙을 따라 순종에 적합한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 내면에는 하나님께서 새기신 지혜와 지식, 영혼 전체의 성실이 존재했다. 이러한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서 아담의 의사를 묻지 않으셨지만, “아담은 물론 이 하나님의 입법과 거기 포함된 조건들에 충심으로 찬동했고, 따라서 이 교섭에는 언약의 모든 요소가 포함”되었다. 이와 유사한 다른 교섭들도 성경은 명백히 언약이라 부른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노아의 교섭(창 9:11, 12), 아브라함과의 교섭(창 17:1-12)을 언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저 동산에서 아담과의 교섭도 언약이 될 수 있다.”
인류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법을 통한 구원의 불가능성
인류의 첫 조상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죄를 지을 가능성 속에서 피조되었다. 그들이 범죄 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과 의지로 막지 않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운명적 필연성이나 절대적 결정론 속에서 피조하시지 않고 그들을 판단과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순종하는 존재로 지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고히 할 것은, “아담의 상태는 아담으로부터 모든 변명을 제거하도록 이바지한다. 그는 많은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연약성 때문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고의성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에 있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아담은 타락에 의해 인류의 대표로서 넘어졌다. 그는 공동의 공인으로 넘어진 것이다. 행위언약을 통해 부과된 약속과 저주는 아담뿐만 아니라 그 후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위해 받은 것은 우리도 받은 것이요, 그에 대해 상실한 모든 것은 우리에게도 상실된 것이다.” 여기서 아담의 죄와 형벌의 전가를 추론할 수 있다. 인류의 첫 조상의 행위언약에 대한 파기의 결과로 모든 인류는 두 가지 비참한 손상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죄책(guilty)와 부패(pollution)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째 인간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갖게 되었고, 둘째, 모든 인간은 모든 종류의 사악한 생득적 부패의 자연적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됨으로 인해, 그 구성요소인 지식과 의, 거룩함을 잃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전 성품이 타락하여(total depravation) 스스로의 힘으로 행위언약의 요구를 성취할 수 없게 되었으며, 행위의 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여 졌다. 타락을 인해 구원에 있어 철저히 무능한 상태가 되었다. 선악과를 따먹은 불순종의 죄악의 성격은, 그것이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범해진 것으로 그 죄의 무게와 깊이에 있어 역시 무한하다. 따라서 그 정죄 역시 영원한 성격을 가지며 그에 상응하는 정죄가 가해져야 한다. 따라서 이미 타락하여 불완전해지고, 구원에 있어 철저히 무능해진 인간으로서 그 무한한 정죄를 속할 길이 전무하다. 이에 대한 정죄의 결과는 지옥의 형벌에 해당한다. 따라서 아담이 타락한 후 행위언약을 다시 갱신하고 그것을 다시 지킴으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타락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이 파기되었기에 아담과 인류는 행위언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곧 행위언약은 유효한가 폐기되었는가? 이에 대해 알미니우스주의와 개혁주의의 입장이 다르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법적 계약은 아담이 타락할 당시 폐기되었다고 생각한다. 약속은 취소되고 약정은 파기되었으며, 인간의 순종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순종을 강조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패한 인간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함과 그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라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 새로운 계약과 율법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믿음과 복음적 순종의 법으로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충분한 은총의 도움을 입어 이 법에 순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언약에 있어서 한 당사자가 그 의무에 실패하면, 그리고 그 조건을 수행하지 못하면, 다른 당사자는 언약 파기자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을 파기한 당사자는 상대방이 자유롭게 놓아주기까지 자유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에 있어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에서 자유하시지만, 또 인간의 언약 파기로 그 약속을 상실했지만, 순종의 의무는 여전히 남아서, 심판의 근거로서 의무사항만이 유효하다. 인간은 순종할 수 없고, 언약의 이행에 있어 철저히 무능할 지라도 언약 파기의 빚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로도 행위언약은 여전히 남아 모든 자들이 사망의 심판 아래 있음을 지시한다. 그리스도 안에 믿음으로 거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행위언약의 구속력 아래 있는 것이다. Louis Berkhof는 행위언약의 유효와 폐기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유효함에 있어서는, 첫째, 하나님과 인간의 자연적 관계가 이 언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한 행위언약은 폐기될 수 없다. 둘째,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에 있어서 그러하다. 셋째, 조건적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한 그렇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자신의 주권대로 거두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아무도 이 언약을 지킬 수 없다. 폐기에 있어서, 첫째, 은혜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긍정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한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가 자기 백성을 위해 그 요구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둘째,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서 그렇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은 무능력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위언약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 귀속될 뿐, 은혜언약 안에 있는 택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행위언약에 대해 그리고 행위의 법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과 그 무능력으로 행위언약으로 구원 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은혜언약을 시행하셨다.
“은혜언약” 아래에서의 “믿음의 법”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을 통한 인간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은혜언약이라는 두 번째 언약을 맺으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은혜언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첫 번째 계약에 의해서는 생명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 번째 계약을 맺으신바 보통 우리는 이것을 은혜의 계약이라고 부른다. 이 은혜의 계약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말한다. 이때에 하나님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이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고 생명을 얻기로 정해진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믿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은혜언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으로 그를 통해 생명과 구원을 베풀어 주심을 의미한다. 은혜언약에서 구원은 은혜 안에서 성령의 사역을 통해 갖게 된 믿음을 통해 성취된다. 따라서 은혜언약에서 구원은 “믿음의 법”(the law of faith)를 통해 얻는다. “믿음의 법”은 “복음”과 “은혜언약”과 동의어처럼 쓰일 수 있다. 은혜언약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은혜언약에서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옛적의 법적 언약을 절대적으로 완수하신 일을 토대 삼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에 참예함으로 성취된다. 믿음은 우리가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또 그의 역사를 붙잡는 손에 불과하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구원의 진정한 근거가 된다. 행위언약에 있어 행위의 법을 완전하게 순종하므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할 때, 은혜언약에 있어 믿음의 법을 따라 믿어야 사는 것이다. 믿음은 은혜언약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며 수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의 근거와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은혜언약에 있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붙드는 믿음의 대상이요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믿음의 중심에 우리의 복음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리스도의 사역이 자리 잡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셔서 구원하기로 예정하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여 성육신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시행은 삼위일체 간에 언약 곧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세우시기 위한 삼위 간의 “구속의 언약”이 영원 전에 존재했다. 이를 근거로 은혜언약이 시행되었다. 이를 근거로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자가 되셨다. 그는 둘째 아담이 되시고 택자들의 대표자가 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파기한 행위언약의 요구를 떠맡으시고 성취하셨다. 곧 적극적 순종(율법 준수)와 소극적 순종(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중심 당사자가 되어, 이 모든 일을 수행하시고 성취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성취하신 구속의 사역을 은혜롭게 택자들 가운데 적용하신다. 즉 중보자로서, 언약에서 확보하신 축복들을 믿음을 조건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신다. 따라서 은혜언약에서는 믿음이 조건이며 그 믿음을 수단으로 삼아 구원과 영생이 약속된다. 또한 그의 백성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믿음과 순종의 보증이 되셔서 이것들이 소멸되지 않으리라고 보증하신다.
“은혜언약”에 있어 신구약의 동일성과 차이점
은혜언약은 신구약에 있어 그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며 그 시행의 방법에 있어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차이점과 동일성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계약이 맺어지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서로 다르다. 구약시대의 유대인들의 계약은 약속들, 예언들, 희생제사들, 할례, 유월절 어린 양 및 다른 유형들과 제정들에 의해서 특징지워졌으니, 이 모든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것으로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피택자들에게 약속된 메시야를 신앙하도록 교훈하고 세우는 일에 있어서 그 당시로는 충분하였고 효과적이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이 약속된 메시야에 의하여 충분한 속죄와 영원한 구원을 얻었으니, 이 계약을 우리는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약에는 구약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는데, 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와 세례와 성만찬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제도에 의하여 맺어지게 되었다. 이 제도는 수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적고 외견상으로 구약에서보다 더 단순하고 덜 화려하게 보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백성들에게 보다 충만히, 보다 명백히,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되는 것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 계약을 신약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본체가 다른 두 은혜의 계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체를 지닌 은혜의 계약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이 집행되는 방법에 있어서만 구약과 신약이 다른 것이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첫째, 은혜언약은 시행 방법에 외면적 변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 둘째, 옛 경륜 하에서 이 언약은 주로 예표와 상징적 규례들로 실시했지만, 이 예표와 상징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의미했다. 그리고 이런 실시 방법은 거의 유대민족에 한정되어 있었다. 셋째, 이 언약의 새로운 실시는 옛 시행 방법보다 분명하며 충만하며 확실하며 영적 능력이 있으며 적용범위가 넓다. 그리고 옛 언약에 있어 지상의 축복을 통해 영적 축복과 구원을,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축복 구원을 직접 드러내시고, 이 안에서 지상의 축복도 약속된다.
그러나 그 동일성을 살펴보면,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나 인류의 구주는 그리스도이며,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다. 이것에 차이는 없다. 신약과 구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곧 은혜언약의 주제로서 그리스도, 조건으로서 믿음, 열매로서 구원이란 요소들이 신구약에 있어 동일하다. 신구약 시대 모두 언약의 대상자들은 선택된 자들로 제한되며, 이 은혜언약 안에 택자들은 행위언약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이 행위언약일 때, “행위의 법”(the law of works)로서 율법에 부과된 기능이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행해야 사는 행위언약에서 해방되고 벗어난 자들로 그것이 부과하는 율법에 대해 구속받지 않는다. 그들에게 율법은 은혜언약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법”(the law of Christ)으로서 기능하고 적용된다. 따라서“이러한 조건성은 행위언약 아래에서만 구원론의 의미를 갖는 것이고, 은혜언약 아래에서는 은혜로 베푸신 구원의 의미를 드러내는 역할만 할 따름이다.” 행위언약 아래서 율법 곧 행위의 율법이 요구하는 조건성은 그것이 완전한 순종으로 성취될 때, 구원을 약속하고, 그렇지 못할 때, 곧 불완전 내지 파기될 때, 사망의 선고를 내린다. 곧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이다. 구원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은혜언약 아래 있는 성도들은, 은혜언약 아래서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일 때, 구원론적 의미를 상실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조건성은 사망과 생명의 조건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 받은바 생명의 결과 열매로서 표명되고 누려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이 순종할 때, 은혜로서 주어지는 약속으로서 열매와 축복 그리고 신앙의 성장이 있고, 불순종 될 때 사망이나 정죄가 아닌 부성애를 근거로 한 그리고 그들의 성화를 위한 징계의 위협이 있을 뿐이다. 이 위협이 축복인 것은 죄성을 죽이므로 신앙의 성장을 목표로 하는 긍정적인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위언약적 의미에서 율법의 약속과 위협 아래 생활하는 것은 큰 오류이다. 그들은 행위언약에 대해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율법일 때, 율법 아래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뒤에 언급될 “그리스도의 법”을 다루는 부분에서 상술하겠다.
따라서 신약 시대나 구약시대에 모든 택함 받은 성도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언약 안에 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신구약의 차이를 점진적 계시관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곧 본질의 차이가 아닌 명확성과 범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보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열매가 더욱 뚜렷하고 명확하고 넓게 계시되고 적용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도의 차이지 본질의 차이가 아니다. 칼빈의 “복음과 율법의 구분,”그리고“문자-영”(letter-Spirit)의 해석학적 틀은 이러한 정도의 차이 가운데 본질의 동일성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먼저 율법은, 그것이 그 자체로는 오직 죄악된 인간들에게 명령과 정죄의 역할만 할 뿐 죄를 극복하도록 돕지는 못한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들로 거룩하게 만들어 율법의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복음을 통해 성령을 소유하고 죄를 용서받는다. 그러므로 복음은 “영”이다. 율법은 그 자체로 성령을 갖지 않기 때문에 “단지 문자로서 귀에 말하는 의에 관한 법규”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통해 율법과 결합하심으로 그것은 영이 되며, 복음 자체가 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율법은 좁은 의미로서 그리스도 없이 고려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에 의해 차용된 전체 가르침 속에서 볼 때, 넓은 의미로서 새 언약 안에서의 복음의 설교로 여겨질 수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율법 아래 있던 구약의 성도들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구약 시대보다 신약 시대에 있어 “성령의 중생과 그리스도를 인한 칭의”가 본질이 아닌 정도와 범위에 있어 탁월하다. 이렇게 설명될 때,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본질적 통일성이 결코 축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믿는다. 각 차이들은 부수적이고 외적인 것들을 다룬다.”그러므로 신구약에 있어 은혜언약은 하나의 영원한 언약이 된다. 따라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개념을 혼동하거나 혼합하거나 은혜언약의 한 구성요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은혜언약”안에 있는 구속의 이중은총: 칭의와 성화
은혜언약 안에 많은 축복들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주된 축복이 존재하는 데 그것은 칭의(justification)와 성화(sanctification)이다. 칼빈은 여러 곳에서 bipartite covenant(2부로 된 언약)을 말했다. 구원의 두 은혜들의 언약적 기초가 그의 가르침의 특별한 정황 속에서 만난다. 곧 언약의 형식 안에서 구원의 역사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이 이중적인 유익들을 가져왔다. 이러한 통찰의 결과는 이 이중적 유익들이 하나님의 용서와 성도의 필요한 행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의 의미와 관계는 “구원의 서정”(order of salvation)의 측면에서 다루어질 뿐만 아니라 언약이란 신학적 틀 속에서 조망될 때, 그 의미를 통찰할 수 있다.
칭의와 성화를 다룰 때, 우리는 “두 가지 유익들이 구분이 될지라도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구분됨과 분리되지 않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혼동할 때, 로마 카톨릭의 공로주의 내지 율법폐기론자들의 양 극단적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언약적 틀 속에서 이중의 유익을 살피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다. 곧 “다른 한 쪽의 필요를 따라 언약의 한 유익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맹렬히 공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언약은 구원의 유익들을 조직화하는 것을 돕는다. “칭의와 성화의 두 언약적 유익들이 구분된다. 그러나 분리되지 않게 그리스도와 관계되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다. 그래서 양자가 위대한 구속적 유익들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언약은 본질적으로 동일시된다.” 따라서 이러한 통찰은 칭의에 있어 효과적으로 공로주의를 반대하면서도 그 반대 극단인 율법폐기론을 대처할 수 있다. 오직 믿음과 은혜 아래 성도의 합당한 삶과 선행 곧 성화의 문제를 은혜성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한 언약 안에서 동시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혜에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념은 또한 명확히 구분되어 혼동되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칭의의 개념을 살펴보자.
“은혜언약” 안에 “칭의”의 개념
은혜언약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은 “행위의 법”에 있지 않고 “믿음의 법”에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의 전적 부패로 인한 무능성 때문이다.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적극적 순종과 소극적 순종을 통해 행위언약의 요구를 충족시키시고 구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있으며, 이를 받는 수단은 오직 믿음이다. 이 믿음은 오직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인간의 부패로 인해 그리스도의 공로와 복음을 믿는 믿음에 어떤 인간적인 수단이나 행위가 끼어들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에 대한 교리를 인해 신분의 변화와 법정적 선포로서 칭의는 실제적인 점진적 상태의 변화과정을 다루는 성화와 구분될 수밖에 없다. 칭의에서의 완전히 의롭다하심을 받음과 상태적으로 의로워져 가는 과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내게 공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순전한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킴으로 의롭다 하시며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는 것이다. 칭의는 인간의 행위도, 심지어 신앙자체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처럼 복음적인 순종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지할 뿐이다. 그런데 이 믿음조차도 이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칭의를 통해 성도에게 용서와 축복의 약속이 더해져 있다.
칭의는 택자들을 대상으로 효과적인 부르심에 의해 성취된다. 의롭다하심의 성격은 하나님께서 심판자로서 하시는 순전히 법적인 행위이다. 이는 법적인 행위인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해“어떤 사람이 법의 요구와 완전히 합치한다”는 선언이다. 따라서 거룩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하는 성화와 구분된다. 칭의와 성화는 한 언약 안에서 한 주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혜의 구분된 두 줄기이다.
칭의의 근거는 신자의 위대한 대표자와 보증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하나님께서 신자의 공로로 돌리심에 있다. 곧 “의롭다하심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칭의를 통해 얻은 의는 어떤 율법에 일치한 행동이나, 선행,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 의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통해 이루신 의의 전가일 뿐이다. 따라서 은헤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행위언약에 대해 죽었으므로, 그것이 행위언약 일 때, 행위의 법을 통해 구원받으려 하거나, 불완전한 순종으로 인해 구원을 의심하거나, 그것으로 삶의 규범을 삶으려 해서는 안 된다. 칭의는 오직 은혜언약 안에서 주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은혜언약 아래 “믿음의 법”은 오직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호의를 전적으로 의지함을 요구할 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호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조차도 은혜언약 아래서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구원에 있어 전혀 인간적인 자랑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칭의를 받는 수단은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을 논할 때 조심할 것은 믿음이 은혜언약의 조건이라는 이유로 이를 인간의 공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은혜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은혜로 신자에게 돌려주시는데 대해서 필수적이고 유일한 조건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자기의 의로 즉 자기가 용납되며 의롭다고 인정되는 근거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을 의롭다하심의 ‘조건’이라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요구되며 필요한 도구”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여기서 수단으로서 믿음의 기능은 그리스도의 의롭다하심의 진정한 근거를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수단을 의미한다. 즉, 믿음의 주요한 기능은 “그리스도의 의를 깨닫고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는 데 있다. 깨닫고 받아들이는 기능이 믿음의 주된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선물이다. 칭의에 있어 모든 행위가 배제되기에, “믿음을 하나의 덕으로, 혹은 행위로 본다면 믿음 그 자체도 배제되는 것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로마 카톨릭 교회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처럼 믿음을 인간의 의지의 산물과 공로 혹은 칭의의 근거로 보고 “믿음 때문에”(on account of faith)라는 개념을 쓰지 않고, 다만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의미로 “믿음으로 말미암아”(by faith) 혹은 “믿음으로”(through faith)를 사용한다. 참으로 칭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자비에만 기원과 근거를 둔다. 칭의는 영원전 택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작정된 것이었다. 작정과 하나님의 뜻을 좇아 때가 차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구속을 성취하셔서, 믿음이란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의롭다하신 것의 축복은 부패된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틈타거나 혼합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오직 모든 자랑은 하나님께만 있다.
“은혜언약” 안에 “성화”의 개념
은혜언약 안에 있는 두 은총 가운데 이제 두 번째 은총을 살펴볼 차례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두 가지 구원의 유익 가운데 칭의와 구분되는 성화의 은혜가 있다. 성화의 은혜는 신분적, 법정적 선포로서 칭의의 개념과는 달리, 실제로 중생한 택자에게서 전인적으로 나타나는 상태의 변화이다. 성화는 칭의의 근원인 그리스도의 연합으로부터 동시에 주어지며, 믿음 안에서 중생시키심과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심에 의해 율법의 순종을 통해 실현된다. 그러나 이생에서 인간의 남은 죄성을 인해 불완전하고 과정적이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구분과 관련성을 잘 파악해야 한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구분과 관계성은 인간의 부패와 관련 맺는다.
개혁신학은 죄의 이해와 관련하여 죄책과 이에 따른 형벌은 ‘칭의’와 연결하고 죄의 성품은 ‘성화’와 연결한다. 그리스도의 칭의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생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모든 과실의 책임과 그에 따른 형벌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공로 안에서 완전히 해소되었기 때문에, 성화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죄책과 그의 형벌의 속상과 상관이 없다. 성화를 기반으로 하여 칭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칭의를 전제로 하여 성화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타락 이후에 죄책을 발생하게 하는 원죄 곧 부패한 성품을 새롭게 함 없이 결과물인 죄책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칭의와 성화는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곧 신분의 변화인 칭의의 은혜는 상태의 변화인 성화의 은혜를 “후행적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만, “원인적 혹은 선행적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전제”하지 않는다. 곧 성화의 의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종속적 의(subordinate righteousness)가 된다.
이렇게 성화가 정의되고 칭의와 구분되며 동시에 관계지워질 때, 이러한 성화의 교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그것이 은혜언약 아래 그리스도의 법 일 때)에 대한 순종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열매인 선행의 여지(room)을 갖게 된다.
“은혜언약”아래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으로서의 율법
“은혜언약”에서의 성화를 근거로 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선행의 의미
우리는 언약은 쌍방 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및 하나님께서 인간을 관계하시는 양태로 파악할 때, 언약의 조건성 혹은 요구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조건성에 직면해 우리는 그것의 성취를 정의하기 위해 칭의와의 관계를 규명하고, 은혜성 아래서 어떤 의미로 공로가 되지 않으면서, 어떠한 근거로 그 요구에 순종할 수 있고 받아들여지는 지를 살펴야 한다. 곧 이러한 노력의 필요성은 언약의 조건성 내지 요구성에 직면한 인간은 비록 칭의와 성화의 은혜 안에서도 역시 죄성과 불완전한 순종만이 가능하다는 정황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풀려야할 딜레마와 신학적 과제는 개혁주의 신학 안에 탁월히 정리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확신한다. 오직 구원과 삶의 열매의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은헤 안에 믿음에 돌리면서도 거룩을 추구할 수 있는 신앙적, 신학적 사고와 삶의 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우리는 이것을 다룰 것이다.
먼저 언약의 쌍무적 성격을 살펴보면, 언약은 항상 무조건적인 성격과 쌍무적인 성격을 함께 갖는다. 언약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약 자체가 인간과 관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낮아지심에 근거하기에, 언약은 하나님 편의 기원 없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절대적 신성은 그의 백성을 향한 자신의 약속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언약에 있어 우월한 위치를 점하신다. 그러므로 언약은 무조건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다스리실 책무가 있으시고, 우리의 복지와 안녕을 책임져 주실 책임을 가지시는 동시에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시행되고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언약은 편무적이다. 그러나 언약이 인간 역사 속에서 어떤 시점에서 시행될 때, 그 축복은 인간의 순종을 통해 인간의 책임 안에서 응답되어야 하므로 쌍무적인 성격을 또한 갖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종의 문제가 대두된다. 여기에서의 질문은 “순종의 언약적 조건에 대한 언급은, 칭의가 언약의 유익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조건들이 칭의와 연결될 수 있는가?”에 있다. 곧 이 문제를 답하기 위해서는 순종과 언약 그리고 칭의의 조건 그리고 성화의 은혜와 칭의의 구분과 관계성의 의미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배경은 로마 카톨릭의 율법주의 및 공로주의였음을 상기할 때, 율법-복음의 이분법적 틀에 치중했던 루터와 칼빈과 언약신학자들 사이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위가 받아들이신다는 신학적 입장을 거부했다. 예를 들면, 1535년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이사야 64:6의 해설을 통해 이를 표명했다. 칼빈과 대륙의 언약신학자들(federal theologians)은 이러한 루터와 카톨릭의 입장 가운데 중용의 길을 걸었다. 객관적으로 살필 때, 루터의 신학이 설명하지 못한, 믿음 안에서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 혹은 성도의 믿음 안에서 거룩한 삶의 추구라는 주제를 개혁신학은 더욱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칼빈은, 이사야 64:6의 해설에서 인간 행동의 순종 안에 있는 어떠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지만, 그는 모든 선행이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루터는 모든 경우에 있어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지는 선행을 반대하지만, 칼빈은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선행의 받아들여짐을 확고히 확신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개혁신학은 오직 믿음과 은혜로 인한 칭의를 유지하면서, 성화의 개념을 전제로 그와 관계해 불완전한 인간의 상태의 정황에서 하나님께서 받아들여진 선행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일까?
첫째,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법적이고 신분적인 변화로서 칭의와 상태의 변화로서 성화의 은혜를 구분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이중의 은총으로 여겼다. 개혁신학은 칭의를 우선적 의로, 성화를 종속적 의(subordinate righteousness)로 설명하므로, 칭의가 원인과 전제가 되어 부차적이고 종속적으로 성화의 열매가 맺어지는 이치를 설명했다. 중생자들 안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화의 열매는 은혜를 전제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선물인 것이고, 구원의 열매로서 표명과 누림인 것이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총의 개념은, “쌍방적이고 분리될 수 없는 언약의 유익의 성격 때문에, 성도 안에 두 가지 형태의 의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행위의 의가 칭의의 의에 종속되고 그러므로 칭의와 반대되지 않는다.”곧 이중은총에서 두 가지 의는 칭의에 있어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와 성화에 있어 생득적 의(inherent righteousness)를 의미한다.
이처럼 칭의와 함께 받아들여진 의의 인정으로 “선행”을 인정할 이유는, “‘오직 믿음으로’에 신중하고 건전한 해석이 주어지지 않으면, 오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학적 틀은, “분리되지 않고 동시적인 구속의 유익을 주장”하므로 “칭의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혜스런 은사에 의해 제공된 순종에 의해 결합된다”“율법의 문자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칭의를 따라 일하실 때, 복음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성화가 불완전한 점진적 과정으로 나타난 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완전성의 문제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중생한 성도라 하여도 그 안에 죄성을 지니고 불완전한 순종 밖에 드릴 수 없는 정황을 살펴야 한다. 성화가 순종과 선행의 여지(room)는 주지만, 성도의 죄성을 인한 불완전성을 인해 그러한 선행이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둘째, 완전성의 문제와 관련해, 개혁주의의 해결책 중 하나가 인격(person)과 행위(works)를 의롭게 하시는, 부성애적인 하나님의 관대하심(liberality)이다. 어떻게 불완전한 우리의 선행과 죄성을 가진 성도의 가치 없는 행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이 행위언약에 대하여 죽고 은혜언약에 대해 산 자가 되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율법의 요구와 약속 그리고 그 적용 곧 시행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에 있어 구별된다. 곧 행위언약일 때, 율법은 “행위의 법”으로써, 이 율법은 불신자들을 향해 완전한 순종을 요구할 뿐 그 준수에 있어 어떤 도움도 주지 않으며, 불이행시 정죄하고 심판과 저주를 부여한다. 그러나 은혜언약 일 때,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으로 구원에 있어 순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직 구원은 “믿음의 법”으로 얻은 바, “그리스도의 법”은 성도에게 성화의 측면에서 순종을 요구하며, 불이행시 징계함으로 성도를 정화시키고 교정할 뿐, 결코 사망과 정죄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순종이 존재할 때, 은혜로 축복의 약속이 더해진다. 즉,“행위의 법”이 좁은 의미의 율법이라면, “그리스도의 법”은 “문자-영”의 해석학적 틀로 정의된 넓은 의미의 율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율법-복음”의 루터적 이분법의 율법 개념보다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되었든 간에 양 언약의 율법에 있어 모두 순종을 요구하는 조건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 불완전한 성도의 선행이 어떻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행위언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부성애적인 하나님의 관대하심(liberality)이 은혜언약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혜언약 안에서 율법의 약속이 복음의 약속으로 대치된다. 율법의 약속은 완전한 순종을 전제로 축복을 약속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지킬 자가 없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총이 불완전한 행위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아주시는 것으로 만들므로 언약 안에 있는 조건성을 충족시킨다. 은혜언약에서 율법은 사망의 저주가 제거되고,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적용되어 하나님의 관대하심 안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 순종에 약속이 덧붙여져 축복하신다. 칼빈은 말한다.
그러나 [율법의 약속이] 복음의 약속으로 대치될 때에, 이 약속은 죄를 값없이 용서한다고 선포함으로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될 만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까지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판정하실 뿐 아니라, 저 언약 하에서 율법 준수 자들이 받기로 되어 있던 복을 우리의 행위에 주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율법에서 의와 거룩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해서 치러주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보상에서 행위가 은혜를 얻는 이유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은혜언약 아래서 복음의 약속의 대치는 성도의 보잘 것 없고 불완전한 선행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받아들여지는 근거가 된다. 칭의는 인격(person)과 행위(works)를 의롭게 한다. “언약의 축복들을 율법 준수자에게 빚지고 있다. 이러한 언약적 축복은 언약의 준수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사람과 그의 행위를 하나님께 기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칭의에 의하여 언약 준수함에 대한 약속이 죄인에게 실현될 수 있다.” 그의 백성을 위해 언약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언약 안에서 조건성의 성취는 인간의 완전성에 있거나 인간의 공로에 의존하지 않는다. 언약 안에서 은혜를 부여하심으로 순종의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1차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 인간의 순종은 2차 원인에 불과하다. 또한 그 행한 행위도 역시 불완전함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므로 인간이 자랑할 수 없다. 성도의 순종은 “불멸을 향한 발걸음”(step toward immortality)라 불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언약에서와 같은 과도한 정죄를 멈추시고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 주시고, 또한 아버지로서 우리를 자녀로서 대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언약은 입양과 동의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곧 입양은 그 백성을 향한 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 때문에 그의 백성의 불완전한 순종이 받아들여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을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약속을 더하셔서 축복까지 베푸신다. 이것은 더하여진 선물이라 할 수 있다. 선행이 우리의 공로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선행에 대한 보상을 주심은 또 하나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행위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자(judge, supreme right)로 죄인을 대하시지만, 은혜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father, tenderness)로 그 백성을 대하신다.
셋째, 구속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선행의 실천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선행의 당위성을 은혜에 대한 감사로서 설명한다.
86 문. 우리가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이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비참한 처지에서 구원받는데, 어째서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고 또한 그의 성령으로 그의 형상을 따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축복에 대해 우리의 삶 전체로 감사하게 하시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며, 또한 각 사람이 그 열매로 자기 믿음을 확신하며, 또한 우리의 경건한 삶을 통해서 우리 이웃들도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에서 그는 그의 계명을 권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언약에 들어간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며 지고한 명예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그 계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무엇보다도 가장 사모할 만한 것이 그들에게 값없이 허락되어졌다고, 즉 그들이 하나님과의 허락이 결속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 절에서 그는 비교함으로써, 이러한 특권을 한층 더 높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들에게 보다도 그들에게 더욱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감사함을 나타내기 위해 그들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들이 자애로우신 아버지 되심을 체험한 그 하나님께 열렬한 애정이 담긴 예배로 보답하지 않는다면, 변명할 말이 없게 되었다.
선행은 값없는 칭의와 연관되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의 열매이다. 따라서 선행이 은혜의 열매인바 우리는 이에 대해 감사로 응답해야 하며, 또한 구원에 안에 주어진 온갖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자발적 순종이 필요하다. Anthony A. Heokema도 성화에 있어 율법 적용의 동기를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또한 칼빈은, 신명기 6장 20절을 주석을 통하여, “모세가 이 절들 속에서 촉구하고 있는 유일한 요지는 그 백성이 그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그들의 감사를 입증해야 한다는 것과 그가 그 열조들에게 가르치도록 명한 바로 그 종교가 그들의 후손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요지는 그 계명의 모든 가르침이 준수되어야 하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구출된 후에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에 대한 감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 구절에서 그는 “그 백성이 더욱 기꺼이 그리고 더욱 진지하게 그 계명을 경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구속(redemption)을 상기시킴으로써 그 계명을 권고하고 있다. 그것의 권위는 그들에게 더 강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감사의 표현으로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결코 인간편의 의를 세우고자 제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칼빈의 십계명 서문에 관한 주석에서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성화적 삶에 대해 많은 언급이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다. 곧 선행에 대한 목표는 인간의 의를 자랑하거나 높이는 데 있지 않다. 선행은 우리가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이므로, 은혜의 주인되신 그리스도를 주(主)로 받드는 고백적 행위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선행의 귀결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데 있음을 가르치신다(마 5:16).
“은혜언약”아래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의 기능과 적용
이러한 근거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과 그 열매로서 선행의 여지를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화의 외적 열매로서의 선행을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한 것만으로 제한하기에 최종적으로 언약의 구분 가운데 은혜언약 아래서 성도에게 율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므로, 이글의 결론적 진술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성도의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적용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언약의 구분과 그에 따른 율법의 구분된 의미를 규정하고, 그에 따른 율법의 기능을 제3용도를 통해 정리해야 한다.
율법의 본질은 행위언약에서의 “행위의 법”이나 은혜언약에서의 “그리스도의 법”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시행과 형식에 있어 차이가 난다. 행위언약의 형식은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이지만, 은혜언약은 “살라 그리고 행하라”이다. 행위의 법은 그리스도 밖에서 창조자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전달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에 의해 전달 된 것이다. 행위언약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자로서 그들을 대하시므로, 그들의 죄성을 인해 그들은 완전한 순종을 드릴 수 없으므로 항상 정죄 가운데 빠져들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은혜언약 안에서 행위언약의 의무와 정죄는 성도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본질이 동일한 율법은 은혜언약 안에서 성도에게는 “그리스도의 법”으로 적용된다. 택함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하여 성령의 능력 부여하심을 통해, 또한 감사의 표현으로서, 칭의의 열매로서 선행을 추구할 능력을 부여 받는다. 그러나 성도도 죄성으로 인해 불완전하기에 완전한 순종을 드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부성애적인 관대하심(liberatory)으로 성도의 불완전한 행위를 완전한 것처럼 받아주신다. 은혜언약일 때, 그리스도의 법은 구원을 위해 요구되지 않는다. 구원을 위해 선행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 아니며 행위언약에 머문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이 그리스도의 법이 될 때, 그것은 구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성도는 행위언약에 대해, 행위의 법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행위언약일 때, 그리고 구원의 조건이 될 때, 성도는 행위의 법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정죄도 약속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일 때, 성도는 은혜 안에서 그 법의 순종을 추구해야 한다.
행위의 법과 그리스도의 법은 동일하게 조건과 약속 그리고 위협의 요소를 갖는데, 역시 그 차이점이 존재한다. 행위언약일 때, 행위의 법은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제시되고, 지키면 영생을, 어기면 저주와 사망으로 위협한다. 그러나 은혜언약일 때, 그리스도의 법은 역시 순종을 요구하지만, 그것에 불순종한 것에 대해 사망과 영원한 형벌의 위협이나 영생의 약속을 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법에서 보상의 약속은 순종할 때 영적, 현세적 축복과 신앙의 성장이 보장되지만, 그 법을 불순종할 때, 영원한 형벌이나 저주가 아닌 그를 교정하기 위한 징계가 내려진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과의 친근하고 달콤한 교제의 결핍과 영적이고 현세적인 괴로움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위협의 내용으로서 징계도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교정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에 있어 보상과 약속은 은혜 위에 은혜가 덧붙여진 것으로서 선물이다. 우리의 행위가 불완전하므로,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순종은 당연한 처사이기에 아무도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법에 대한 순종에 축복의 약속을 더하신다.
그러므로 은혜언약 안에 있는 택자들은 행위언약의 약속이나 위협으로부터 자유하다. 요약하자면, 선행의 지침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적용할 때, 우리는 행위언약일 때, 행위의 법과 은혜언약일 때, 그리스도의 법을 구분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한 율법이 이처럼 그 형식과 시행에 있어 구분됨을 인지하여 율법을 성도에게 행위언약일 때의 좁은 의미의 율법일 때와 구분해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도에게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고, 율법이 영원한 형벌의 위협으로 성도를 괴롭힐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은혜와 믿음 안에서 성령의 능력주심을 통해 믿음과 사랑 그리고 감사의 동기로 불완전한 행위이지만, 선행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그의 칭의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부성애적 관대하심으로 성도의 행위를 의롭다하시며 축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 가운데 율법은 이러한 선행의 길을 지시하는 푯대가 되며, 삶의 규범으로 역할한다.
이제 이러한 개념의 그리스도의 율법으로서 율법이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기능하는지를 “율법의 제3용도”를 통해 정리해보자.
첫째, 정죄의 용도이다. 성도에게 정죄의 용도는 저주나 영원한 형벌로 위협함이 목적이 아니다. 행위언약은 성도를 주관할 수 없다. 그러나 택함 받은 성도에게 행위언약의 약속과 경고가 보이는 것은, 그들이 은혜언약의 은총으로 구원 받지 못했을 경우를 보여주므로, 행위언약의 위협과 저주와 정죄 가운데 비참함을 은혜언약의 축복과 비교함으로 구원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용도는 불신자에게도 적용되어 죄를 억제하기도 한다.
둘째, 몽학선생의 용도이다. 이 기능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도 부패한 옛 성품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므로, 율법은 중생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성을 보게 하고(정죄의 용도), 교만한 자기 의를 버리며,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자신의 죄를 미워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와 싸우게 한다.” 이 용도는 죄인식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의 필요성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셋째, 교훈적 및 규범적 용도이다. 이 용도는, “성령의 은혜로 인하여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새 성품과 관련해서 그들이 행해야 할 마땅한 생활 규칙을 제시한다.”
이러한 통찰들은 율법주의와 율법폐기론의 오류를 반박하며, 성화의 교리에 입각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좇아 행하는 선행의 지침이요 규법으로서 율법의 기능을 제시한다. “성화와 선행 그리고 율법은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전적 사역의 한 측면들이기 때문이다.”
결 론
이 글은 택함 받은 성도에게 적용되는 율법의 기능과 적용을 설명하기 위해 언약신학의 체계 속에서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구원의 서정의 개념을 조망하였다. 그리고 언약신학 안에서 칭의와의 차이와 동일성 가운데 성화의 개념을 정립함으로, 성도의 선행의 의미를 조망했다. 성화는 선행의 여지가 된다. 선행의 가치가 건전히 세워질 때, 성도의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의 기능과 적용의 문제가 정리되어야 하는데, 성도에게 적용되는 율법의 의미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구분과 그에 따른 율법의 세 가지 구분 곧 행위의 법, 믿음의 법, 그리스도의 법의 통찰을 통해 정립될 수 있다. 이러한 체계와 논리 가운데 이 글의 결론을 요약해 본다면, 행위언약에 있어 행위의 법은 행해야 하는 법으로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그 조건성을 충족시킬 수 없어,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통해 택자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의의 이루신 의를 성령의 역사를 통한 믿음을 통해 전가하심으로 구원하시고자 작정하시고 시행하셨다. 은혜언약은 믿음의 법으로 사는 언약이다. 은혜언약에 있어 인간의 공로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공로와 자비로 그와 연합될 때, 그 안에 두 가지 은혜가 주어지는 데 그것은 칭의와 성화이다. 이는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칭의를 전제로 그에 대한 종속적 의로서 성화의 의, 곧 선행의 여지가 마련된다. 불완전한 성도의 선행이 받아들여짐은 성도의 행위를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애적 관대하심에 의한 것이다. 이 처럼 성령의 역사로 사랑과 동기로 선행을 추구하게 하시고 불완전한 선행을 의롭다하시며 받아들이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약속을 더하셔서 축복을 제시하신다. 이렇게 선행이 인정될 때, 선행의 지침인 율법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 문제는 언약의 구분을 통해 해결된다. 행위언약일 때, 행위의 법은 완전한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약속하고, 불순종 시 영원한 형벌로 위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행위의 법에 대해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행위언약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은혜언약일 때,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성도에게 연관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성도가 불순종할 때는 징계로 위협하고 순종할 때, 영적이고 현세적인 축복으로 격려하신다. 그러나 이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다만 구원의 열매, 믿음의 열매로서 표명된 것이며, 구원의 열매의 누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은혜언약일 때 율법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요 열매이기도 하다.
이러한 의미들이 정리되면, 우리는 결론적으로 율법의 제3용도를 정리하므로, 성도에 대한 율법 적용의 문제를 종결지을 수 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정죄의 용도, 몽학선생의 용도, 교훈적 및 규범적 용도인데, 이 용도들은 성도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여 구원받은 상태와 행위언약 아래 있는 상태를 비교하게 하므로 구원을 감사하게 하며, 성도를 성화의 관점에서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제시하므로 성도를 성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모든 개념의 핵심은, 구원에 있어 모든 공로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그리고 그의 무한한 사랑에 돌리면서도, 거룩한 삶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따라 선행을 온당히 추구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구원과 구원의 열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그에게만 영광 돌리는 삶을 위해 필연적 지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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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delberg Cate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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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상의 어려움으로 이 소논문의 원본에 기입된 각주는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