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은 먼저 해 아래 세상에 속한 지혜를 추구했으며, 거기서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쾌락 속에 만족이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았다. 이제 주어진 본문은 앞에서 시험한 바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내용들이 전개된다.
먼저, 그는 지혜를 추구하고 지혜를 추구한 결과를 숙고해 보았다. 그의 결론은 지혜를 추구한 자나 망령되고 우매한 자나 그 당하는 일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를 먼저 추구해 보았고, 그것에 실망하여 쾌락으로 눈을 돌려보았지만, 세상적 쾌락과 즐거움에 질리고 혐오감을 느끼게 되어 다시 지혜를 신중하고 신중하게 다시 살펴보고자 했다. 그러나 솔로몬은 더욱 더 깊은 절망감과 허무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유는 지혜자나 우매자나 모두가 꼭 같이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녔고, 그들이 죽음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경험을 후대의 사람들이 새로이 시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왜 솔로몬이 시험했던 것들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가? 하나님께서 그런 긍정적이지 못한 결론에 이르게 될 자기 시험을 모두가 겪지 않도록 솔로몬의 결론을 성경에 기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교훈을 성경에 기록하신 것은 그를 거울로 삼아 인생들이 바른 길을 걷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둠의 일들을 의도적으로 시험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가지고, 최고의 자원과 능력을 가진 자로서 그보다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시험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가졌던 사람이 없다. 번영에서나 도덕적으로나 솔로몬의 최적의 것을 가지고 자신을 시험해 보았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허무와 좌절이었다.
솔로몬이 지혜를 한탄한 것은 어리석음을 미화거나 지혜를 비하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솔로몬은 해 아래 세상에 속한 지혜의 가치가 어리석음보다 높다는 사실을 분명히 표현한다. “내가 보니 빛 속에 어둠보다 뛰어난 것이 있듯이, 지혜 속에 우매함보다 뛰어난 것이 있도다”(13절). 지혜는 분명 술이나 쾌락보다 뛰어났다. 솔로몬은 지혜의 가치를 경험해 보았다. 14절에 기록된 것처럼 지혜는 물리적 세상이나 정신적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게 한다. 지혜는 지상적 수준에서 쾌락보다 더 큰 위로를 주고 인생을 더 바르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지혜는 인생의 눈이다. 지혜는 인생 생활의 위험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하고 인생 생활에 유익이 될 만한 것들을 얻을 기회를 포착하게 만들어준다. 반대로 지혜가 없는 사람은 위험한 길을 걷게 되고 유익한 것을 얻을 기회를 놓치게 된다. 지혜가 세우고 풀어가고 피해갈 수 있게 만든다면, 우매함은 허물고 얽히게 만들고 넘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우매함보다 큰 지혜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왜 솔로몬은 지혜를 한탄한 것인가? 다른 곳에서는 지혜의 헛됨을 한탄하다가 여기서는 긍정하고 또 다시 다른 곳에서 한탄하는가? 모순 아닌가? 솔로몬은 지혜를 한탄하는 것인가 긍정하는 것인가? 솔로몬은 모순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세상에 속한 지혜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세상에 속한 지혜의 한계를 발견하고 직면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적인 지혜가 가진 한계의 본질은 그런 세상적인 지혜가 결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는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지혜에 대한 통찰을 하게 된 것이다. 해 아래의 수준에서 세상 지혜는 우매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가치가 크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면, 해 아래에서 인간이 지닌 세상 지혜는 한계를 가졌고, 죽음 앞에 무능하다. 죽음 앞에서 세상 지혜는 아무런 쓸데가 없다. 세상의 지혜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15절).
솔로몬은 먼저 현실 생활 속에서 세상적 지혜를 가진 자가 반드시 평탄한 삶을 살게 되지는 않는다는 이치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매자가 당하는 일을 지혜자도 당한다. 어떤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지혜가 깊어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알고, 질병을 피할 길을 이론적으로 알아 건강에 세심한 신경을 쓰지만, 그 지혜와 노력과 상관없이 자신에게 찾아오는 질병을 막아내지 못한다. 의심이 많아서 속지 않으려 애를 쓰지만, 결국은 사기를 당하고 속아 넘어가 낭패를 보는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은 세심하고 꼼꼼하게 자신의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지만, 결국에는 실패하는 일도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때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번영과 승리가 주어지는 경우도 세상 다반사이다. 원리적으로 지혜는 바르고 번영하게 하지만, 지혜를 총동원해 인생을 설계하고 살아가도 결코 좋은 결과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세상에 악이 발생한 이후, 우매자만이 아니라 지혜자가 애쓰고 노력한 일들에도 엉겅퀴가 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의 보편성이기도 하다. 즉, 세상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지혜에 대한 한탄은 지혜자들도 망각된다는 데 있다(16절). 세상적 지혜를 가진 자나, 그의 지혜를 표현한 결과물들이나 세월의 흐름 속에 망각되고 만다. 경주에는 가는 곳마다 신라 시대 고분이 가득하다. 거의 작은 동산만한 왕족들의 묘가 산재해 있다. 당시에 그들이 가진 지혜와 권력이 어떠했을까? 무덤은 남기기 위해 만든다. 그러나 오늘날 웅장한 고분 안에 누가 묻혔는지는 알려지는 것은 희귀한 일일 뿐, 대부분의 고분 안에 누가 묻혀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세월과 함께 그의 존재, 이름, 흔적, 기억들이 소멸한다. 뼈 몇 조각, 함께 묻힌 보물이나 소장품들이 빛바래고 녹슬고 부식된 누더기 조각으로 과거의 위용을 빛바랜 모습으로 알려줄 뿐이다. 빛바랜 파편들을 통해 후대의 사람들은 그 때를 회상할 뿐 그 영광을 결코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제나 과거는 현재에 묻혀 버리고 만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들이 과거의 사람들과 일들을 밀어낸다. 역사 속에서는 언제나 지는 해와 뜨는 해가 반복되었다. 당시에 대단한 일들이 후대에는 그 대단한 일이 희미한 기억이나 흔적으로만 남는다. 오래된 역사는 선명하게 그 영광을 비추어 주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보여줄 뿐이다. 세월은 무엇이든 빛을 바랜다. 의인도 악인도 반드시 죽어 사라진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간다.
솔로몬이 지혜를 끝까지 추구하다 도달한 결론이 헛됨이었다. 그것은 세상적 지혜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고, 세상적 지혜자들이 결국 우매자들과 동일하게 되는 지점인 죽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매자나 지혜자나 동일하게 실패하며, 곤란을 당하며, 결국 죽는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적인 지혜나 세상적인 번영이나 세상적인 기억됨을 넘어 하나님의 지혜와 영적인 생명과 하나님 바로 그분 자신께 기억됨이 절실한 것이다. 하나님께 기억된 기억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달라 궁극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하다. 십자가의 지혜는 인생을 구원한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깊은 좌절을 맛본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17절). 솔로몬이 깨달은 바가 무엇인가? 해 아래서의 일과 성과들 그리고 그 즐거움으로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만족을 얻으려면 해 위의 일들과 결실들을 맛보아야 한다. 솔로몬이 느낀 감정은 마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면 그것이 전부인양 재미있어 하고 집착하다가 곧 싫증을 내고 마는 이치와 같다.
24절을 보라. 24절의 더 정확한 번역은 이러하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의 수고 가운데서 자신을 즐겁게 하는 행복이 사람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니라.”
그리고 25절의 더 정확한 번역은 이러하다. “왜 그런고 하면 누가 그를 떠나서 먹으며 또 즐거워할 수 있는가.” 칠십인역에는 “나보다”를 “그를 떠나서”라고 번역했다.
표준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24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25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현대인의 성경도 이렇게 번역한다.
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자기 일에 만족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나 나는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깨달았다. 25 그를 떠나서 누가 먹거나 즐거워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인들에게, 곧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노동한 결실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애쓰고 노력하여 얻는 해 아래에서의 결실들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그 결실들이 사람에게 주는 즐거움 역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해 아래에서 얻은 어떤 선물들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 결실을 주시되 그 결실이 즐거움이 되도록 하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그 경중을 떠나 무엇을 가질 지라도, 먹고 마시고 수고 가운데 결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주신 것을 통해 영혼을 즐겁게 할 수 없다.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이러한 이치이다.
by 박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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