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글

속단을 피하고 삶을 전체로 바라보며 섭리를 의지하는 삶!

노가 없는 배 2020. 8. 8. 14:09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은 

궁극적인 종말을 향해 가는 과정과 노상에 있기에

삶이 다하기까지 

우리의 현실의 파편들에 대해 너무 속단하는 것은 오만일 수 있다. 

우리 안에 죄의 지배력은 죽었으나, 죄의 잔재가 남겨진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삶의 파편들, 현실의 정황들은 

너무 긍정도 말고 부정도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지해 감사하는 삶에 마음에 닻을 내리는 것을 넘어, 파편적인 내 삶의 정황과 불완전한 나의 생의 한 점에 속한 사상과 사건과 일들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혐오하는 것도 덕이 되지 않으며, 이를 너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것도 해가 될 수 있다. 

어쩌면 기독교인의 세계관은 궁극적인 낙관은 허락될지 모르나, 파편적이고 과정적인 삶의 파편들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나 지나친 비관주의는 모두 그릇된 길로 인생을 이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종적 인식은 총체적인 삶의 축적 안에서만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종말의 성취는 달려갈 길을 다 가서, 총체적인 삶의 평가는 생의 전체를 돌아보며 행할 것이다. 

이생에서의 삶의 여정이란, 긍정과 부정의 긴장, 낙관과 비관 사이에 긴장이 존재한다. 그래서 already, not yet! 이미, 아직이다. 삶의 파편을 너무 긍정도 말고 부정도 말라. 삶의 축적, 모든 삶 파편 조각들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 완전히 맞추어진 퍼즐로 완성될 때까지, 겸손히 판단하며 높이지 아니하며 미화하지 아니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적용이 너무 많은 자기 경험으로 넘치는 설교는 주관이 전도되어 적용이 적용이 아니라 적용이 교의가 될 위험이 있다. 삶의 적용이란 삶의 파편들만큼이나 겸손과 여지를 가지고 긴장을 가지고 행해야 할 일들 중에 하나이다. 나도 내 인생의 현실을 잘 모르는데, 누가 누구의 인생의 파편 속에 의미들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똑같은 주제를 이해시킨다고 자기 경험을 이야기 할 때, 모두가 처지가 달라 그 경험이 청자 내지 독자에게 이질감을 줄 때가 많다. 경험이 보편성을 띠는 것은 제한적으로 그럴 수 있다. 적용은 맥락적 의미로만 가능하다. 설교자는 삶의 맥락을 던져주는 것이다. 어쩌면 삶의 파편들에 대한 적용은 맥락을 붙들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 자신이 해야할 일일지도 모른다. 

인생은 맥락을 따를 때 안전하다. 지나친 삶의 정황의 디테일은 악마적일 수 있다. 맥락 안에서 수긍하고 따라가고 파악하는 것이 인생이다. 마음을 하나의 완전한 기계적 매커니즘으로 다루는 인본주의적 심리학이나 마귀적인 시도로서 인생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무속신앙의 위험성은 인간 판단의 한계를 넘나드는 그 디테일과 확신에 있다. 인생의 파편을 붙들고 속단하거나 미화하거나 비관하지 않는 차분한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의 속단과 삶의 파편을 넘어 하나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되는 것 아닐까? 

1 범사가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도서 3:1-11)

 

by  박동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