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ohn Calvin, 출애굽기 34:28절에 관한 주석
“40일이라는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둘째 돌판 역시 첫째 것 못지않게 신뢰를 받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이미 지적했지만 모세가 일상생활에서 후퇴한 것은 그가 율법을 말하자면 하늘로부터 가져오려는 뜻에서였다.
만약에 그가 산에서 겨우 3-4일 머물러 있었다면 그러한 특출한 기적을 통해서 그의 권위가 인정을 받지 못했겠지만, 사십일이라는 숫자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점을 알게 하는데 신뢰를 얻는데 충분했다.
그리고 그러한 장기간에 걸친 금식의 인내는 인간의 본성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위엄이 의심할 여지가 없게 하는 뜻에서 율법의 사역자는 천사의 영광을 부여받았다. 그러기에 그는 “그가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하는 말을 명백히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직무의 특징이 의심을 받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다른 유한한 인간과 구별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심할 점은 이것은 ★★★ 단순한 금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 금식은 모세에게 당분간 육신의 연약성을 면제해 주신 일종의 특권이었으며 그의 상태는 나머지 인간들과 같지 않았다. 그는 천사들처럼 배고픔도 느끼지 않고 음식을 찾아 발버둥치지도 않았으며 먹고 마실 것을 찾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후의 선지자들은 이 금식을 본받노라고 주장한 일이 없으며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자기들에게 허용되지 않은 것으로 다 알고 있는 그것을 흉내 내려 하지 않았다.
물론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율법이 거의 상실되었을 때 그것을 회복하도록, 마치 제 2 의 모세(모세의 율법을 회복하는 역할과 소명)처럼 보냄을 받은 엘리야 역시 40일 간 먹고 마시는 일을 금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의 금식의 이유 역시 비슷했다(마 4:2). 곧 그는 그의 복음에 대한 충분한 신뢰를 획득하는 뜻에서 그가 결코 이 문제에 있어서 모세보다 못하지 않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예외 없이 연례적인 금식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에게 뒤지지 않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그들에게 복음의 새로운 선포가 위임되었다는 식이요, 철저한 무지의 소행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일생에 걸쳐 그는 배고픔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가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하는 이 기간 동안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를 인간들과의 교제에서부터 구별하셨을 뿐이다.“
☞ 통상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금식의 기능과 역할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한 기도를 위한 부차적 수단이라 여길 수 있다. 금식은 육신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무리하지 않게 해야 하며, 금식 자체를 어떤 신비한 능력을 발생시키는 역할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금식의 본연의 역할은 죄악이나 환란 속에서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놓고 기도할 때, 혹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도에 집중해야 할 때, 그것을 돕기 위한 수단이다. 기도의 전력, 기도에 집중하는 보조 수단을 넘어 금식 자체의 어떤 신령한 권능을 부여한다면, 금식은 미신에 빠질 위험성이 많다. 또한 금식은 영적 자만을 경계하는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도 금식할 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나타내려 하는 것을 외식이라 규정하셨다.
특별히 40일 금식기도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사람들이 구속사 속에서 특별한 역할과 지위를 가지고 행한 일로서 매우 특권적이고 비상적인 금식이었다. 이를 우리가 흉내 내어서는 안 되며, 이를 통해 육신의 건강을 해치거나 위험에 처하게 한다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덕을 해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교회는 40일 금식기도를 통상적인 것으로 여겨 많은 사람들이 40일 금식기도를 신령한 은혜의 수단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많은 이들이 생명과 건강의 위협을 받았고, 무사하더라도 40일 금식기도가 공로가 되고 자랑이 되고, 어떤 이들은 명함까지 파서 자신의 40일 금식기도의 횟수를 드러내는 일도 있었다.
기도를 돕고 기도에 집중하기 위한 금식기도가 건전한 모습으로 회복되어 성도의 경건과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일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오늘날 금식기도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이 일그러진 금식기도 문화를 보고 거리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은 너무 금식기도의 유익이 가르쳐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것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적절히 행해지면 유익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by 박동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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