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교회론

성례의 정의와 목적

노가 없는 배 2020. 8. 7. 09:22

by 박동근 목사

 

1.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란 말은 라틴어로 sacramentum이라고 하며,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sacraments로 표기합니다. 그런데 원래 라틴어 sacramentum은 고대 로마 문화에서 두 가지 용례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고대 로마에서, 소송 사건이 있을 때, 거기서 승리하는 자는 자기 몫을 되돌려 받고 패하는 자의 몫은 국가의 공금에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쌍방이 합의하에 어떤 성스러운 장소에나 대사제의 손에 보관시켜 놓는 일종의 공탁금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의미는 전쟁에서 행하는 엄숙한 맹세 혹은 군사적 맹세를 지칭합니다. 맹세는 오직 상관의 명령 외에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겠다는 하나의 엄숙한 서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sacramentum의 성례적 의미는 옛 라틴어 성경 번역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문화와 별개로 헬라어의 비밀”(뮈스테리온, mystery)의 번역으로서 sacramentum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성례를 정의하면, 성례는 숭고하고 영적인 사물을 경건하게 나타내는 표징을 의미합니다. 어거스틴도 성례로서 sacrametum이란 용어를 신성한 사물에 적용되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례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례는 언약의 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례는 언약의 내용과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성례는 표인데, 언약의 내용을 나타내는 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언약의 표로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표입니다. 성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는 표입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2문답도 다음과 같이 성례를 정의합니다.

 

92문 셍례가 무엇입니까?

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인데, 그 속에 그리스도와 새 언약이 유익이 감각적인 표로써 표시되며, ()쳐져서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성례가 제정된 목적과 역할은,

 

첫째, 복음의 약속을 말씀과 더불어 인간의 감각을 통해 보이고 느끼는 형태로 표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의 약속을 말씀과 더불어 인간의 감각을 통해 보이고 느끼는 형태로 확인하고 인치기 위한 것입니다.

 

먼저, 성례가 언약의 표로서 복음의 약속을 표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표한다는 말은 표는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례라는 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각적이고 보이는 형태로 나타냅니다. 성례라는 표는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성례가 언약의 표로서 복음의 약속을 인친다는 의미는 믿는 자가 그로부터 받은 유익의 진실성을 증명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모든 과정을 마친 학생이 실재로 졸업한 사실을 학교의 직인이 찍힌 졸업장으로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 복음의 약속의 유익을 베푸셨고, 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표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례가 복음의 약속에 대한 표가 되고 인침이 된다는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성례의 본연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가리키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라보고 확신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례가 표요 인침이란 의미는 성례가 진정가리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복음의 약속이라는데 있습니다. 성례는 언제나 의식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을 통해 무엇인가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례는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실재를 가리키는 의미에서 표이며, 그렇게 함으로 성도들이 성례가 바라보도록 한 실재를 더욱 확고히 깨닫고 확신하고, 그 확신이 더 견고해지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들을 더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집문서가 있다고 합시다. 그 문서에 한 집이 누구의 소유이며 그가 소유한 집의 평수와 층수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가진 문서에 도장을 찍을 때 이 문서는 효력을 갖고 그 내용들이 문서를 가진 자에게 확증된 문서로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장이 찍힐 때, 종이조각에 불과한 이 문서가 누군가에게 실재하는 집이 소유되었다는 것을 확고히 해줍니다. 여기서 표는 도장찍힌 문서요 그 문서가 가리키는 것은 실재하는 집과 그 소유권입니다.

 

결혼한 두 사람이 반지를 나눌 때, 보이지 않는 이 둘의 사랑을 서로가 더욱 확실히 확인하며 확신케 됩니다. 반지는 서로의 사랑을 신뢰할 수 있도록 돕는 외적 표인 것입니다. 여기서 표는 반지이지만 반지가 가리키는 실재는 사랑입니다. 반지는 사랑을 더욱 확고히 바라보고 확신하도록 돕는 역할, 곧 사랑을 인치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같이 성례는 복음의 약속을 이해시키고 확증하고 인치는 역할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표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언약의 가시적인 표가 필요한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성례는 말씀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을 확립시킵니다. 성례와 말씀의 관계를 살펴보면, 성례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례는 말씀을 가리키는 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성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그 자체로 완전하고 확고부동하며 스스로를 스스로가 확증합니다. , 말씀은 그 진리의 여부를 자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믿음은 연약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수단들을 통하여 괴어주고 받쳐주어야 흔들리지 않고 비틀대지 않는 것입니다. 성례는 말씀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는 믿음의 연약성에 확증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성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의 연약성과 비천함을 배려하셔서 주신 은혜의 수단입니다. “우리가 항상 땅에 붙어 기어다니고 육에 붙어 떨어지지 않으며 영적인 일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이런 땅에 붙은 것까지 이용해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며 육에 있는 우리 앞에 영적인 복의 거울을 두신다고 칼빈은 가르칩니다.

 

따라서 성례는 복음의 약속, 곧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신 구속의 복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확증하시는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언제나 복음의 약속을 가리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례 시에는 말씀이 더해져야만 합니다. 성례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례가 효력이 있으려면 성례가 가리키는 바를 말씀을 통해 목사들이 이해시키고 선포해야 합니다. 성례가 아니라 복음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때 생명과 은혜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력은 성례나 성례의 표가 아니라 성례가 가리키는 복음 자체에 있고, 그것에 응답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성례 시 성례가 가리키는 바를 성도들은 설교를 통해 듣고 알아야 하며, 성례가 가리킨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성례는 유익을 나타냅니다. 가리키는 표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가 가리키는 실체에 능력이 있습니다. 성례는 연약하고 육적인 우리들에게 복음의 약속이 잘 전달되고 확증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려고 세워진 것입니다.

 

성례를 말씀에 대한 인식과 믿음에 의해, 그 성례가 가리키는 바를 붙들 때, 성령께서 말씀이란 수단을 통해 믿음을 일으키시듯, 성례가 가리키는 말씀의 약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고 강화하고 성장케 하고 강건하게 만듭니다.

 

성례는 로마 카톨릭에서처럼 의식에 참여할 때 자동적으로 유익을 주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례는 언제나 복음의 약속이란 실체를 가리키는 손가락, 표의 역할만을 합니다. 그러나 말씀과 믿음으로 성례가 가리키는 바를 붙들 때, 성령의 역사에 의해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고 말씀이 가르친 바가 우리 마음에 확증되고 인쳐 지는 것입니다. 문서를 도장으로 인치고, 남녀의 사랑과 결속을 반지가 확증케 하듯 말입니다.

 

성례는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해 주께서 세우신 것이며, 성례가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믿음을 떠나면 성례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나, 말씀과 믿음 안에서 성례가 가리키는 바를 분별하여 붙들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역자의 말로서 복음을 선포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약속을 성례라는 보이는 말씀으로 전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설교와 성례가 전하는 본질과 실체가 복음의 약속이므로 설교와 성례가 전하고자 하는 본질은 동일한 것이며, 이것에 의해 참교회와 거짓 교회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례의 효력은 성례 자체에서 오지 않고 성례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효력을 나타내려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전제됩니다.

 

먼저, 성례는 무엇인가를 가리키는 것이고 인치는 것이니, 성례가 가리키는 것은 말씀입니다. 곧 복음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고 성찬을 행하는 성도는 성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례가 시행되기 전에 먼저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통해 성례가 가리키는 말씀, 복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례가 가리키는 말씀, 복음의 유익에 참여하기 위해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례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성례가 가리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이 성례에 참여한다면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이러한 무지와 불신 가운데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에게 저주가 되고 심판이 됩니다. 집도 없고, 집에 대한 소유권도 없는 사람이 집문서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불법이고, 집문서를 도용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례에 참여할 때, 성례가 가리키는 말씀, 곧 복음을 인식하고, 복음의 약속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참여할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어 믿음과 확신을 더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91문답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91문답 어떻게 하여 성례가 구원의 효력 있는 방편이 됩니까?

답 성례가 구원의 효력 있는 방편이 되는 것은 그 성례 자체에나 성례를 행하는 자에게 어떤 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축복하심과 또 믿음으로 성례를 받는 자들 속에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례는 다음과 같은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제정된 것입니다.

 

2. 성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a. 성례는 언약의 표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의 표의 역할을 한다.

 

성례가 시행될 때 확증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성례는, 은혜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복들 모두들이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그리고 성례는 은혜 언약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덕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는 동시에 믿음으로 성례에 동참하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구속의 복들과 뜻을 성도들에게 인치는 것입니다. 여러 공문서에 도장을 찍어 문서의 효력을 인치 듯이, 그리고 신랑과 신부가 결혼반지를 주고받음으로 반지를 통해 서로의 사랑과 결속과 서약을 확고히 인치 듯, 성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들을 확고히 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을 맺으신 백성들에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뜻을 확고히 하시고자 언약의 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언제나 언약의 표가 첨부되었습니다. 이는 신약과 구약에 있어 동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과 함께 성례를 제정하셔서 연약한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성례는 말씀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연약한 믿음을 돕고자 주어진 것입니다. 성례를 통해 말씀을 바라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혜의 표요 보증으로 주신 성례가 순전한 말씀의 선포와 함께 시행될 때, 말씀을 통한 약속과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우리의 마음은 더욱 확고한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례의 집행 가운데 성령의 임재가 존재하고 성례의 효과가 우리의 마음에 유효하게 됩니다.

 

성례에 참여한 성도들은 한편으로는 언약의 약속의 풍성한 은총을 발견하고 감사해야 하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의 열의가 은혜 속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은혜에 감사하게 하며, 우리로 충성되게 합니다.

 

b. 성례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의무를 고백하고 시인하며, 우리를 하나님께 매이게 하여 믿음과 선한 양심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성례는 우리를 하나님께 묶습니다. 성례의 중요한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성례가 가리키는 그 약속과 뜻을 믿음으로 붙들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듯,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례를 통해 은혜 언약 속에 약속된 복들을 받고 참된 회개를 일으켜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그러한 존재로 자라가게 하십니다. 성례를 통해 우리의 믿음이 힘을 얻고, 우리의 양심이 더욱 선해질 때, 우리는 회개하며, 용서의 확신을 가지며, 이와 같은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우리의 의무를 더욱 충실히 실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례를 시행하는 목적 중에 하나이며 성례가 성도들에게 주는 유익이기도 합니다.

 

c. 성례는 참된 교회를 모든 다양한 이단 분파들과 구별하는 표지의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존재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짓된 교회에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에 교회의 얼굴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얼굴을 통해 확인합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교회에는 교회의 얼굴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교회의 표지라고 합니다. 우리는 군인들이 그들이 착용한 군복으로 식별합니다. 때로는 어떤 이들이 착용한 배지를 통해 그들의 신분이나 소속을 가려내기도 합니다. 양이나 소에 인을 찍어 목자들이 자신의 양들을 구별해 내듯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표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교회의 표지요, 참된 교회의 얼굴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표를 주신 것은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짓교회와 참 교회를 구별하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교도들을 구별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성경이 가르치는 근본 교리를 전하는 말씀 선포와 함께 성례의 성실한 시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회를 구별하십니다. 이렇게 구별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이 거짓된 교리 속에서 부패하고 비참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성례를 통해 교회를 구별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백성의 위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들을 혐오하시며, 그의 백성들이 마귀의 나라와 혼합되지 않도록 구별되게 하신 것입니다.

 

d. 성례는 복음의 도리가 잘 보존되고 전파되도록 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성례가 가리키는 것은 언제나 말씀입니다. 성례를 시행하므로, 그 말씀과 그 말씀의 적용이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생생하게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례를 세우셨습니다. 연약한 믿음이 성례를 통해 생생하게 감각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접할 때마다, 이 은혜를 상기하고 더욱 신실히 그 은혜를 붙들도록 성례를 제정하셨습니다. 성례가 가리키는 복음의 약속과 복들을 믿음으로 붙들도록, 성령께서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역사하십니다. 말씀 선포와 함께 성례를 통해 복음의 약속이 보존되고, 또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지속될 것입니다. 성례는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 외에 또 다른 수단인 것입니다.

 

e. 성례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 간의 연합과 교제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오직 한 머리 아래서 한 몸이 됩니다. 믿음으로 머리에 연합되었기에 성도들은 몸의 일부가 됩니다. 각 지체는 결코 홀로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영적 유기체입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교회 개혁의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순간 교회의 지체들은 하나가 되고 연합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순간 교회의 지체들은 성도의 교제를 갖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성도의 교제가 깊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가 되는 순간, 형제와 자매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역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은혜의 수단이며, 그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이 서로를 성도의 한 몸으로서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말씀 선포와 성례 안에서 한 몸이 되며, 연합하고 교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7).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4:3-6).

 

우리가 성례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택을 바라보기 위함이고, 그 은혜를 감사하기 위함이며, 이를 인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은택을 주신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하나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그런 이유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겠다는 결단을 위한 것입니다.

 

3.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이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가?

 

a. 일치점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점과 그것들의 실체들에 있어서 일치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성례들이나 신약의 성례들은 모두 동일한 축복의 약속을 나타냅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모두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과 성령주심이라는 축복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성례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속의 복을 바라보도록 제정된 것입니다.

 

이를 입증하는 성경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13:8).

 

우리 조상들이...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두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뒤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2:11).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

 

어거스틴은 신약과 구약에 있어 성례의 일치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과 신약의 성례들은 표에서는 다르나 그 나타내는 것들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한다. 조상들 모두가 동일한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은 이 땅의 음식은 우리가 먹는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만나를 먹었으나 우리는 그것을 먹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먹은 신령한 음식은 우리가 먹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성례들이 나타내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었고 또 지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백성들도 우리보다 희미한 계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과 교제가 존재했습니다. 신약을 사는 우리들 못지않게 구약의 백성들도 말씀과 성례들로써 그 사실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통해 나타낸바 말씀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 외에 다른 연합과 교제를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b. 차이점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첫째, 예식과 의식에서 차이가 납니다.

 

구약의 성례에는 신약과 다른 의식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림하심으로 외형적인 예식에 변화가 생겨, 새 경륜의 시작이 나타났습니다.

 

둘째, 숫자에서 차이가 납니다.

 

과거에는 갖가지 다양하고 고통스러운 예식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숫자가 줄어들었고 단순해 졌습니다.

 

셋째, 그 의미에서 차이가 납니다.

 

구약의 성례는 장차 오실 그리싀도를 나타내는 것이었고, 신약의 성례는 이미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넷째, 그 기한에서 다릅니다.

 

구약의 성례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만 계속되는 것이었고 신약의 성례는 세상 끝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다섯째, 그 대상 범위에 있어 다릅니다.

 

구약의 성례들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고, 다른 민족들로부터 회심한 자들에게는 할례가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례는 어느 민족에 속했든 온 교회 전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28:19).

 

여섯째, 그 선명도에서 다릅니다.

 

구약의 성례들은 장차 올 일들을 미리 그림자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더 희미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례들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제정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성례들이 나타내던 바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더 분명하게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4. 성례에서 표와 표가 나타내는 것의 의미와 둘 사이에 차이점

 

성례에는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표요 다른 하나는 표가 나타내는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표에는 실체를 나타내는 역할을 맡은 물건과 외형적인 예식 전체가 포함됩니다. 그러므로 세례에는 물이 존재하고, 성찬에는 떡과 포도주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례에 말씀이 선포되므로, 표가 나타내는 실체를 성도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표가 나타내는 실체는 말씀이 전하는 것과 동일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로부터 비롯되는 은덕들입니다.

 

그렇다면 표와 그것이 나타내는 것 사이에 차이는 무엇입니까?

 

첫째, 그 본질에서 다릅니다.

 

표는 물질적이며 가시적이며 땅에 속한 것으로 그 본질이 물질성에 있고, 표가 가리키고 나타내는 실체는 신령하며 불가시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가 나태내는 바의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성령의 역사 속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타내는 실체가 신령하다고 할 때, 신령하다는 말의 의미는 빗물질적인 실체 혹은 성령을 지칭하기도 하고, 성령의 역사하심과 효과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대상 혹은 성령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받아들여지는 것, 성령께서 거하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바 영적인 영향력의 대상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라는 성경의 표현이 그러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성례에서 신령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입니다.

 

둘째, 그 받는 양상에서 다릅니다.

 

표는 가시적으로, 입과 몸의 지체들로 눈에 보이도록 받으며, 따라서 불신자도 똑같이 받습니다. 그러나 표가 나타내는 바는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으며, 오직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떡과 포도주를 먹을 수 있으나 그 나타내는 바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 그 목적 혹은 용도가 다릅니다.

 

표가 나타내는 것들은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집니다. 그것들이 영생 그 자체이며, 혹은 영생의 일부이며, 최소한 영생을 얻는 데에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표는 약속된 그것들을 믿는 우리의 믿음에 인을 치며 확증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어집니다.

 

5.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표와 표가 나타내는 바가 연합될까요? 이 주제를 성례적 연합이라 부릅니다.

 

연합이란 두 가지 이상이 하나로 합쳐져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표와 표가 가리키는 바의 연합을 성례적 연합(sacramental union)이라 부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을 기념하는 데에 사용되는 표가 그 표가 나타내는 그것으로 바뀐다고 봅니다. 이를 화체설이라 부릅니다. 사제가 축사할 때, 떡의 본질이 실제 그리스도의 몸의 본질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가 축사한 떡은 실제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이처럼 표의 본질이 다른 무엇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떡은 떡의 본질을 잃지 않고, 떡이 나타내는 바도 그 본질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 것이 연합입니다.

 

그리고 표와 표가 나타내는 바는 물질적 결합(corporal conjunction) 혹은 물질적 연합이 아닙니다. 여기서 물질적 연합은 표와 표가 가리키는 것이 한 덩어리로 뒤섞여 혼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혁신학은 이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에 감추어져 있는 식으로, 표 안에 표가 가리키는 것이 들어 있는 것처럼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는 공재설로 루터파의 성례관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떡의 본질과 함께, 떡 안에 실제의 예수님의 몸의 본질이 공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성례적 연합의 참된 의미는 표와 표가 가리키는 바가 상호 관계성을 갖는다는 의미이지 양자가 변화되거나 표 안에 표가 가리키는 것이 한 장소에 함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표는 실체를 가리키는 역할로서 실체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 상호 관계성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표와 그 표가 나타내는 것들 사이에는 유사성 혹은 상응성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례가 만일 성례를 이루는 바 그것들과 특정한 유사성이나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성례가 아닐 것이다.”

 

둘째, 표와 그 나타내는 것들을 함께 제시하는 데 있고 또한 적절한 시행을 통하여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있는데, 이는 믿음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사역자로부터 표를 받고 또한 그리스도로부터 그 나타내는 것들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정당한 시행을 통해서 그 둘을 받을 때에,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성례적 연합이라 부릅니다. 정당한 성례를 시행할 때, 표와 그것이 나타내는 실체가 관계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표는 실체를 나타내는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적 연합이란 표와 실체가 물리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표는 실체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되, 성도가 믿음으로 표를 통해 표가 나타내는 실체를 받아들일 때, 효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떡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성령께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와 실체는 물리적으로 하나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표가 실체를 가리킨다는 것과 믿음으로 그 표가 가리키는 바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관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관계가 사라질 때, 그 둘은 더 이상 연합한 상태가 아닙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표와 그 나타내는 것들 사이에 세우신 질서가 유지되는 한, 그 나타내는 것이 그 표와 함께 제시되고 인 쳐 집니다. 그러나 이처럼 신적으로 지정된 것이 사라지면, 표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제시하거나 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와 실체가 물리적으로 연합되어 있지 않고, 다만 관계로서만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표가 질서 가운데 예식으로서 거행되고, 그 예식을 믿음으로 참여해, 표가 가리키는 실체를 믿음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만, 성례에 성령의 유효적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질서과 관계가 끝나면 떡은 그냥 떡일 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떡일 뿐인 떡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성례가 거행될 때 실체를 가리키는 표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4. 성례의 정당한 시행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1:27에서 바울은 교회가 성례를 정당하게 시행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우르시누스는 성례의 정당한 시행을 세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식들을 순결하게 준수한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의미와 그로부터 비롯된 의식을 성경이 가르쳐 주신 성례로부터 제거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성경이 지시한 의미와 의식들이 삭제되었다면, 그것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성례는 성경 대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본연의 의미와 형식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례를 순결하게 시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위하여 성례를 제정하신 그 사람들이 이 예식들을 시행하는 경우, 믿음과 회개를 고백하고 세례 받은 교회 회원들 외에 어느 누구도 성례에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정체성이 흐려질 때, 성례는 부패되고 맙니다. 성찬이 순결히 지켜지기 위해서는 세례의 순결성이 전제됩니다. 교회는 세례를 신중하고 엄중하고 순결하게 베풀 때, 그들의 믿음과 회개의 표를 신중히 분별하는 과정을 갖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의 표를 신중히 고려하지 않고 세례가 남발되거나, 형식적으로 치우쳐 세례가 베풀어질 때, 믿음과 회개의 표를 드러내지 않은 사람들이 성찬에 참여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진정한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성찬 참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과 믿음과 회개의 진정성을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지만, 교회는 신앙의 외적 표지를 신중히 고려하여 세례를 베풀고 회원권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만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파에서는 회원과 비회원, 세례자와 세례 예비자의 경계가 분명하였습니다.

 

셋째, 성례가 예수께서 재정하신 바에서 그 의미와 의식의 요소들이 빠지거나 더해질 때, 그 성례는 이미 성례가 가리키는 것과 관계적인 연합을 잃게 됩니다. 또한 믿음이 없이 표를 받는 경우에는 표와 그 나타내는바 그것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대로 연합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례는 그 의미와 의식과 그 의식을 대하는 성도들의 믿음이 함께 구비되지 못하면 성령의 임재가 그 의식 가운데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적절한 의도로 성례를 시행해서도 안 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구약 백성들에게 경계한 바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5:6).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은 성찬을 미사로 부패시켰습니다. 미사는 화체설과 구약의 율법주의화 되어 반복되는 제사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미사 자체가 사제들에 의해 집행될 때, 그 자체로 자동적으로 효력을 갖는다는 사효성(ex opere operato) 등에 의해 성경의 의미들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미사를 개혁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효과 없는 성례가 어떤 것인지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경계할 때, 성도들은 이 말씀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은 한 점의 죄도 없이 깨끗한 상태에서만 성례에 참여하는 것처럼 생각해 자신의 부족을 깨달은 사람이 성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성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완전한 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물론 우리는 죄를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성찬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잘 고려해보면, 사실 성찬은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제정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또 사죄의 은총과 성화시키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확실히 붙들기 위함입니다.

 

성찬이 저주가 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음입니다. 오히려 성례에 참여하며 우리는 우리의 죄와 그리스도의 구속의 자비를 더욱 또렷이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이 저주가 되는 것은 믿음이 없음입니다. 진정 성찬에 참여할 때, 그것이 오히려 죄가 되는 상황은 우리의 죄를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의 의미를 망각하거나 믿지 않거나 불신하거나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보혈의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혹은 부정하는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의미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사죄의 확신과 주님께 회개하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 불분명하다면, 성찬의 떡과 잔을 내려놓고 믿음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례에 참여할 때, 그 성례가 성령의 임재 가운데 효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말씀을 통해 성례가 가리키는 유익들과 의미를 인식해야하며, 말씀에 대한 참된 믿음과 신앙으로 성례에 참여할 때, 우리는 성례가 가리키는 바 그 실체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