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묵상

시편 5:8-11 : 그리스도의 공로와 의가 가져온 유익, 죄인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부어지다!

노가 없는 배 2020. 9. 10. 17:51

by 박동근 목사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한편으로는, “삶의 여정으로서의 길”이라는 흔한 지혜의 은유를 통해 자신이 올바른 길, 곧 의의 길(주의 길)에 머물 수 있도록 간구합니다. (트렘퍼 롱맨 3세, 98.)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기도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무수한 올무 속에서 안전히 인도해 주시며, 완전히 사방으로 포위되어 붙잡히고 말 것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돌파구를 열어 달라는 간구가 담겨 있습니다. (John Calvin, 시편 5:8절에 관한 주석.)
실로 성도의 안전과 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달렸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은 본질적으로 신앙에 달렸습니다. 믿음의 손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를 받는 일 외에 바른 관계를 맺을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로를 전가 받기까지 하나님과 화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패와 오염으로 타락한 인생은 그리스도 안에 그의 보혈의 샘에 몸을 씻기 전까지 정결함도 회복할 수 없습니다. 먼저는 믿음이요,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고, 거듭난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의 역사로 성도는 살고, 보고, 듣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분의 길을, 생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아야 하고, 그 안에서 화목 된 성도들의 심령에 성령과 말씀이 거하여 산 자의 길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실 길을 걸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고 생명이 있는 곳에 순종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구하는 주의 공의와 주의 길은 신앙을 전제하며, 신앙을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열매들을 함축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주의 공의”를 복음적이고 은혜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칼빈은 “주의 공의”(*t,%q;d]xib])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고 지탱함에 있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사랑으로 이해합니다. (John Calvin, 시편 5:8절에 관한 주석.)
다윗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지합니다. 그는 환란과 연약함 가운데 있는 자신의 최고의 안내자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너무도 완벽한 포위를 당하였고, 어리석고 부족한 자신의 육신의 판단으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기에 신실하시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다윗을 붙드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길을 곧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에게 지혜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사악이 우리를 지배할 때, 분별력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신속히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속히 달려가는 자는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9절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사악한 자들의 불의를 드러냅니다. 무엇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지, 그 둘러싼 존재들의 사악의 진상이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9 그들의 입에 신비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다윗을 둘러쌌던 악인들의 속성 중에 하나는 그들이 부정직하고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John Calvin, 시편 5편 9절에 관한 주석.)
다윗은 이들을 “무덤”에 비유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이들이 죄로 죽어있고, 그들 속에서 죽음에 속한 것을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음에 이를 말을 뿜어냅니다. 그들 속에서 나오는 것은 사망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트렘퍼 롱맨 3세, 98.)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라는 표현은 그들 안에 게걸스러운 탐닉이 가득하고, 만족을 모르고 피흘림을 욕망하는 어둠이 가득하다는 의미입니다. 무덤 속에 썩은 시체가 가득하듯 그들의 목구멍으로 나오는 것은 사망에 속한 것들뿐입니다.

이들이 사악한 것으로 가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윗은 어떤 근거로 이들을 사악한 자들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을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의인으로 인식하는 것일까요? 어떤 근거로 저들은 불의에 속한 악인이며, 자신은 하나님께 보호와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의인의 자리에 있다는 것일까요? 다윗은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공로 사상을 가진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피고 있는 이 구절을 신약 성경에서 바울이 어떻게 해석하여 적용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바울은 구약의 이 구절을 모든 인류의 타락의 보편성, 죄의 보편성을 전하기 위해 인용하였습니다. 바울의 요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타락하여 죄책과 오염을 벗어난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 의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타락 전 죄가 없었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충만했던 첫 조상의 상태처럼 그 안에 지식이나 거룩이나 의에 있어 온전한 사람이 타락 이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의인과 악인, 공의의 불의는 단지 도덕성에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원수로 표현한 사람들의 본질이 무엇인가하면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중생이 없어 하나님 앞에 참된 믿음과 회개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못하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있든지 교회 밖에 있든지 하나님의 원수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저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라는 표현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온 인류의 타고난 본성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사망 외에 다른 것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칼빈과 어거스틴은 불신자들의 도덕성과 종교성과 같은 것에서 나타나는 덕이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덕을 생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죄를 억제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찬란한 악덕”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가진 자신이 의인의 무리에 속했다는 자의식은 “자기 의” 사상이나 “공로”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다윗의 말을 인용해 죄의 보편성을 확증했으므로, 다윗도 죄인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의, 자기 공로 의식으로 자신을 악인들과 구분지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의 은혜로 사죄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됨을 의식한 것입니다.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전하고자 했던 것은 세상에 의인은 없으며, 의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율법을 만족시키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제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밖에는 없다는 진리였습니다. (트렘퍼 롱맨 3세, 99.)


하나님의 공의라고 부른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으로 “분배적 의”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지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자를 의롭다 하시며, 그것에 미치지 못하거나 그것을 거스르는 자를 정죄하시고 형벌하십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생이 이 의에 미치지 못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에 미치지 못하거나 율법을 범한 모든 자들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능동적 순종), 그들이 이룰 수 없는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이루어(수동적 순종) 율법의 요구를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릿그도의 구원하시는 이 공로와 의를 전가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서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분배적 하나님의 의 앞에서 심판을 면할 수 없기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선물로서 전가되는 의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성은 그리스도의 대속 성취 사건을 통해 입증됩니다!

다윗은 신앙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 의인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다윗을 용서받게 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이 의를 통해 다윗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는 모든 환란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의지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얻은 의는 신앙에서 온 의였습니다. 이 의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했기에, 이 의로 다윗과 하나님은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의를 전가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환란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고 성도들이 부르짖을 이유는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화목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고,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어서 그 어떤 것도 그 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끊어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신앙을 지닌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신앙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바른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 속에서 완전한 사랑이 전해집니다. 신앙은 우리가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으며 소망을 가질 이유 중에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신앙의 사람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은혜 속에 건재하게 되는 것은 결코 공로와 자기 의 때문이 아니라 은혜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주어진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죄가 보편성으로 자리한 세상에서 언제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초석은 신앙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모두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로운 자들이요 용서 안에서 거룩한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지기 까지 그분의 보호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와 같은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