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근 목사(안양 한길교회)
장로교회의 성도들은 예배와 정치와 교제와 생활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경에 근거한 신앙고백 그리고 성경의 원리와 목적에 부합한 질서 안에서 영위(營爲)한다. 성경은 교회가 발생하고 존립하며 사역하는 토대요 기초이고, 정당한 신앙고백은 말씀에 대한 교회와 성도들의 응답이다. 말씀의 부르심을 받아 신앙을 고백한 교회는 예배와 교회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 속에서 교회를 통해 가시화하고 드러낸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원리가 흔들릴 수도 멈출 수도 없다. 그러므로 칼빈은 교회에 얼굴이 있다고 말하며 교회의 표지를 강조하였다. 교회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존된 성례가 나타나고 권징이 교회의 표지로 추가될 수 있다. 이것이 교회가 종말의 때까지 추구하고 나아갈 푯대이다.
그러나 이 푯대를 향해 나아간다고 할 때, 우리는 이 말의 참 의미와 이러한 부르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가 있다. 특별히 개혁신앙과 장로교 정신을 추구하는 우리의 교회들과 성도들 안에 다음과 같은 긴장과 의문과 논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이 제시하는 푯대가 너무도 높아 따라가기 버겁다는 정서이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이 푯대에 도달했다는 자의식에 의해 때로는 타인에 대한 비판의식과 정죄하는 오만에 빠지기 쉽다는 정서이다. 어떤 이는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은 도달할 수 없는 의식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이상(ideal)일 뿐이기에, 단지 개혁신학과 사상은 의식의 영역에서만 의미를 갖고 현장 목회에서는 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킬 위험이 높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개혁신학과 개혁신앙에 대한 이러한 정서들이 가져오는 두 가지 반응은 첫째, 개혁신학을 현실 목회에서 포기하거나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타협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고, 둘째, 개혁신학의 이상에 누군가 혹은 어느 교회인가 도달했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도 있다. 한편은 좌절과 타협이요 다른 한편은 교만과 정죄로 일관된 오만이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이러한 위험한 두 가지 늪에 빠져 허덕여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 이 태도는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곳에 여러 모양으로 경험되곤 한다.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과정일 수도 있는 이러한 두 가지 늪을 어떻게 대처해 건전한 개혁신학과 신앙 그리고 목회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필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들이 고백했던 고백서들에 이러한 난관을 잘 대처할 원리와 지혜가 전해지고 있다고 확신한다.
개혁주의의 출발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의식이 중요하다. 어디로부터 출발할 것인가? 칼빈은 교회의 출발점을 하나님의 용서로 보았다. 교회로 부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여죄가 남겨져 있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사람들의 연합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죄 사함이 없다면 교회는 존재하지도 못했고, 지금도 여죄를 지닌 자들로 구성된 연합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죄 사함의 토대 위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겸손해야 한다(Inst. IV. 1. 20-21). 개혁신학은 언제나 완전주의(perfectionism)을 이단시 해왔다. 그리고 교회의 표지를 도덕성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두었다. 또한 신앙고백들에 표명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도 동일하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2문에서는 지상의 모든 교회와 성도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을 따라 고백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의인들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모든 측면에서 일치해야만 하는데, 이생에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불완전하고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고백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VI. 5.)과 벨직 신앙고백서(Belgic Confession, article 15.)에서도 메아리친다. 칼빈도 말한다. ““우리의 불완전함(imperfection)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가장 훌륭한 행위도 여전히 항상 어떤 육의 불결(impurity)로 얼룩지고 부패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지꺼기가 그것[선행]에 섞인다는 것이다(Calvin, Institutues, III. xiv. 9.).” ”고백서의 담긴 정신을 따라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목회를 한다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 같다. 개혁주의 신앙과 목회를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 첫째, 중생하고 거듭난 성도들로서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을 따르지만, 언제나 우리가 여죄를 지닌 죄인이란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완전이란 있을 수 없다. 더욱 성숙한 신앙과 덜 성숙한 신앙이 상대적으로 존재하나 모두가 완전하지 못하다. 둘째, 그러므로 죄 사함의 은혜 아래 우리가 존재하고 죄 사함을 인해 불완전하지만 용서 안에서 목표를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 두 인식을 통해 개혁신학을 오만이나 정죄에 일관하는 패해에 빠지지 않는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가 좌절이나 타협에 빠져들지 않는데 도움이 되는 항목이다. 우리에게 완전의 푯대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그곳이 교회와 성도가 종말에 도달할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종말의 성취와 함께 도달할 목표이다. 그러나 이 푯대를 바라보고 추구하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질서가 추구할 이상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연약함 속에서 추구하라고 명령하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함이 버리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우리가 연약하고 죄성으로 가득하기에 말씀과 신앙고백과 교회의 질서가 더욱 절실하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푯대가 없다면 죄성으로 가득한 우리의 본성은 어디로 가겠는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더 가야할 목표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만이나 타협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고백이 예배와 삶 속의 태도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죄인으로서 그리고 죄인들로서 모여 죄 사함에 의존해 하나님의 말씀의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개혁신앙이 추구하는 말씀과 신앙고백과 교회의 질서들은 우리가 연약하고 크나큰 죄의 영향력 속에 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고 유익한 것이다. 죄 사함 안에서 최선을 다해 추구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할 때 회개하며 계속 나아가는 것이 지상의 나그네 성도들의 본분인 동시에 또 구속적 복의 누림이기도 하다. 타협과 좌절과 정죄를 넘어 개혁신학이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서고 연합하고 하나되는 구심점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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