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근 목사
장로교회는 장로들의 회(會)를 통해 성도들을 돌보고 목양하며 치리하는 교회 정치 제도를 가진다. 이것이 세상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장로교회의 외적인 체제이고 제도이다. 그러나 장로교가 가진 이러한 교회 정치 제도는 보이지 않는 토대 위에 서 있으며, 장로들의 회(會)를 통해 돌보고 목양하고 치리하는 교회 정치 제도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목적이자 단 하나의 목적을 지향(志向)한다고 할 수 있다. 장로교 정치 제도는, “교회의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 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라는 신앙고백을 구현하기 위해 세워졌다. 장로교와 장로교가 가진 교회 통치 혹은 목양의 원리는, “교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으며,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시다”라는 신앙고백의 구현이고 가시화일 뿐이다. 그리스도만 교회의 주인이시며 그리스도만 교회의 머리시라는 고백을 떠난 곳은 이미 장로교회가 아닌 것이다.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넘어 이 신앙고백을 떠난 곳은 교회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교회에 있어 유일한 “하나님의 권위”(jus Divinum)를 고백하는 교회가 왜 장로교회여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장로교회를 논하기 전에 “하나님의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만 관계하지 않고 교회와 관계되어야만 하는가?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이신데,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신적 권위가 교회와 관련된다고 말씀하시는가? 만일 하나님의 권위가 교회와 관련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이런 질문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워져 사역하며 지상에서 주어진 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반드시 답해져야 할 질문들이다. 이 글을 통해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권위는 분명 교회와 관련된다. 하나님의 권위가 교회와 연관될 때, 교회의 통치 혹은 교회의 권세 혹은 교회 정치와 같은 주제와 연관해 다루어질 수 있는데,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교회와 연관시키는 과정에서 큰 왜곡들이 있어왔고 작금(昨今)에도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이 문제가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인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장로교회의 본질적 정신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신앙고백과 직결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바로 정립할 때,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가 되시며, 이 주제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인과 머리고 고백하며 따르는 신앙이 부패하게 된다. 종교개혁은 중세 로마 교회의 이러한 문제를 개혁하고자 했다. 장로교회가 가진 제도들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한 종교개혁자들의 열매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권위는 교회와 연관된다. 어떤 의미로 연관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 안에 지배력이 죽었지만 잔재하며 영향력을 끼치는 여죄와 연약성을 인해 교회를 세우셨다. 특별히 칼빈은 교회를 신자들의 “어머니(mater, mother)”라고 불렀다. 칼빈(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 지상의 모든 성도들 안에는 무지와 게으름과 경망(輕妄)한 천성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성도들의 믿음을 일으키고 자라게 하여 목표에 이르도록 전진시킨다고 가르쳤다. 바빙크(Herman Bavinck)의 『개혁교의학』을 보면, 신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통치는 필수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치는 간단하다. 죄 사함을 받고 중생한 성도들 안에 영화에 이르기 전까지 죄성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지상에서 죄와 투쟁해야 하며, 때때로 넘어지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돌봄이 필요하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권위와 다스리심은 교회론적으로 구속적 다스림이며 목양적이고 영적인 통치의 성격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다스리시고 모든 영역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편 사회를 국가라는 통치 수단을 통해 다스리시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우셔서 영적인 통치로 다스리신다. 전자를 칼의 통치라고 부르고, 후자를 영적 통치라고 부른다. 둘은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나 그 성격과 원리를 인해 구분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 구속적이고 영적인 통치를 다루고 있다. 지상에 잠시 나그네처럼 머물러야 하는 신자들과 교회는 죄성과 연약성에 휩싸여 있어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가 절실하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권위와 통치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통치는 연약하고 죄성이 가득한 성도들을 용서 안에서 성화시키시며, 죄와 사망과 마귀의 영향력 속에 있는 성도들을 훈련하시고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는 목양이요 돌봄이요 훈육이요 치리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영원한 중보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그의 완전한 중보 사역을 통해 신자들을 모으고 양육하며 죄 많은 세상에서 보호하시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교회의 주인과 머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시라는 말의 의미는 어머니처럼 연약한 자녀들을 품에 안아 훈육하고 보호하는 목양적 통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절실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주님이 없이는 성도도 교회도 없다. 종말론적 시대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통치는 그들이 험한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근거와 토대가 되고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 관계된 권세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고 권세이며, 중보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그분께서 교회의 머리요 주인으로서 교회를 양육하시며 치리하신다. 교회의 권세의 주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시다.
교회의 권세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것이며 그리스도의 것이라면, 왜 그 권세를 교회의 권세라고 부르기도 하는가? 교회와 신적 권세를 연결 지을 때, 그 권세는 본질적이거나 중보적인 의미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되고 하나님의 권세에 종속된 권세로서 그렇게 연관 지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교회라는 수단 없이 하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교회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적 통치 혹은 구속적 통치는 교회와 연관된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세와 권능으로 교회를 돌보신다. 그러나 제도와 기관과 사람을 통해 그렇게 하신다. 이처럼 교회와 하나님의 신적 권세를 연결시킬 때, 교회에 연관 지워지는 권세를 철저히 하나님께 종속된 것으로만 주셨다. 장로교는 하나님께서 목사와 치리장로와 집사라는 삼직분을 통해 교회를 섬기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특별히 목사와 치리 장로가 회(會)를 이루어 목사를 통해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집례하게 하시고, 목사와 치리 장로를 통해 성도들을 훈육하고 치리하게 하신 사실을 인식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적 통치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 결과이다. 장로교는 직분이 목양하고 치리하는 가운데 회중이 질서 있게 예배하고 교제하고 생활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교는 독재적이고 전횡적인 로마 교회의 교황 제도나 감독 제도를 성경을 떠난 제도로 여겼고, 반대로 직분적인 질서를 경시하는 회중정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치리회로서 노회(老會)를 갖지 않는 독립교회를 성경적인 교회로 여기지 않았다. 장로교회는 전횡적이고 독재적인 정치도 사사기적인 모든 회중들이 각자의 소견을 따라 교회를 통치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장로교회는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은사로 덧입힌 직분을 통해 목양하고 치리하며 성도들을 돌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적 권위는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고 다스리고 치리하도록 부르시고 세우신 직분 제도와 관련된다.
그러나 직분과 치리회에 연관되는 교회 통치의 권세 혹은 권위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전제를 가지므로 하나님의 신적 권위에 종속되고 그 사역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정당성이라 함은 성경적인 장로교 정치 제도와 직분과 치리회의 사역적이고 봉사적 권세가 오직 그리스도의 머리되심과 주되심만을 드러내고 나타내고 구현한다는데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직분과 치리회의 돌봄과 훈육과 치리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종 드는 것으로서 여겨져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 제도와 사람이 일하나 언제나 그 권세와 영광이 그리스도께 돌아가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와 토대 위에 사역이 수행될 때뿐이다. 바빙크는 『개혁교의학』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기뻐하는 뜻은 자신의 주권을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넘겨주지 않지만, 그들의 봉사를 사용하여 그 주권을 수행하고 그들을 통치해 모든 만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도 교회는 결코 통치 없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교회는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되고 제도적으로 설립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순서와 이치를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교회를 통치하는 신적 권위는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도와 사람을 사용하시어 당신의 통치를 수행하신다. 그런데 어떤 제도와 어떤 사람의 봉사를 사용하시는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제도와 사람을 통해 당신의 통치를 가시화하신다. 그럼 어디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신 줄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어디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가 드러나는가? 그래서 우리는 성경과 참된 신앙고백과 선하고 덕스러운 교회 질서들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들이 저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역한다고 한다. 심지어는 이단들에게서도 이러한 구호가 들려질 수 있다. 만일 제도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참된 신앙고백과 선하고 덕스러운 교회 질서를 따르고 구현하지 못한다면, 그곳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통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으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얼굴로서 교회의 표지를 주셨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 선포와 성례와 권징이라 할 수 있지만, 모든 다른 요소들은 말씀에 종속된다. 목사와 관련된 신적 권위는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성경을 따라 수행하는 목양에 권위가 주어진다. 치리 장로와 관련된 신적 권위는 성경을 따라 훈육하고 치리하는 그 사역 위에서만 권위가 주어진다. 즉, 그 제도와 사람을 사용하시어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신다는 증거는 말씀과 참 신앙고백과 선하고 덕스러운 질서에 따른 것이냐의 유무에 달린 것이다. 만일 성경과 신앙고백과 선하고 덕스러운 질서들을 무시한 채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행한들, 그 제도와 사람의 봉사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존재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를 단지 사람이 받들고 수종들므로서만 그 제도와 직분의 역할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제도를 통해 사람이 사역하지만, 권세의 주인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되신다. 그러므로 말씀과 참 신앙고백과 선하고 덕스러운 교회의 질서에 의해서 교회의 권세, 제도의 권세, 직분의 권세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권세가 되고, 그리스도께 종속된 권세가 되어 그리스도께만 속한 권세의 의미가 유지되고, 그리스도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는 원칙이 지켜질 수 있다.
필자는 이로써 장로교회의 정신과 장로교 정치 제도가 갖는 본질적 의미를 대략 전했다고 생각한다. 보편교회는 성경적인 제도와 직분을 통해 성경적인 목양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작금에 교회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의 중심에 “교회의 권위”에 대한 무지와 곡해와 왜곡이 있지 않나 우려해 본다. 사실 교회만이 아니라 보편 사회도 많은 갈등에 휩싸여 있다. 사회와 가정 그리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이 “권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빚은 참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갈등, 가정의 부모와 자녀들의 갈등, 교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갈등들이 보통 “권위”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사회적 문제들 중 큰 부분들이 “권위주의”와 “탈권위주의”라는 양극단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일들이 아닌가 진단해 본다. 특별히 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부패한 권위주의에 의해 사회와 가정과 교회가 신음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한편 오늘날 민주화가 되어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있었으나, 그러한 운동들 안에 철학적, 문화적 조류들은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선하고 건강한 권위의 회복이기보다는 권위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려는 탈권위적 극단으로 나타나지 않았나 조심스레 진단해 본다. 더욱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는, 타락한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심에 의해, 권위주의와 탈권위주의적인 요소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내게 권위가 주어질 때는 권위주의로 나아가고, 타인의 권위의 행사를 받을 때는 탈권위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모순적이고 비일관된 태도가 우리 안에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국가에는 칼의 통치를, 교회에는 영적 통치의 권위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권위주의도 진리가 아니고, 탈권위주의도 진리가 아니다. 특별히 교회는 성경적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적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리스도인 시민으로서 사회와 가정에 선한 권위가 잘 서도록 그리스도인들은 기여해야 할 것이다.
사실 권위는 아름답고 절실한 것이다. 우리의 정서 속에 권위는 왠지 모를 거부감을 일으킨다. 이렇게 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권위주의를 권위로 착각하거나 이로 인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권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신다는 것이 신적 권위요 교회의 권세의 본질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의 권위는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는 구속의 사랑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권세와 다스림 혹은 통치는 연약하고 죄 많은 백성들을 용서 안에서 성화시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권세는 교회를 향한 희생이고 열심이고 사랑이다. 그 권세의 수행이 교회의 영적 복리를 가져오고 보장하며 교회의 소망과 위로의 전부가 되고 전체가 된다. 인간 세상에서 나타나는 권위의 부패로서 권위주의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류가 아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라는 삼직분 역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연약한 성도들, 죄 많은 성도들을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손길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권위는 언제나 뒤집으면 권위 행사를 받는 대상들을 향해 수행할 의무가 된다. 의사의 권위는 환자를 고치고 돌보는 것이며, 부모의 권위는 연약하고 무지한 자녀들의 정신과 육체를 낳고 돌보고 훈육하여 길러내는 의무가 아닌가? 부모의 권위란 사랑하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소진하고 희생하는 것 아닌가? 남편의 권위란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역시 자신을 소진할 의무에 본질이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남편의 권위를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고 희생하신 것에 비유한다. 교회의 직분은 연약한 성도들을 말씀과 훈육함으로 돌보고 양육하는 데 있으며, 범죄한 성도가 있다면 권징을 통해 회개시켜 그들의 신앙을 회복시키는데 있다. 직분자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께 종속된 사역과 봉사적 권세는 연약한 성도들을 향한 의무이며 희생이어야 하고 수고이어야 한다. 교회이든 사회이든 가정이든 권위가 이렇게 정의되고 실천된다면, 권위는 분명 하나님께서 교회와 사회와 가정에 주신 선물이 될 것이며, 그 권위들 속에서 선한 아름다움이 느껴질 것이다. 권위는 죄 많고 연약한 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이 될 것이다. 바라기는 병들고 부패한 권위주의와 탈권위주의가 떠나가고, 교회에 선하고 아름다운 성경적인 권위가 교회에 세워져 그리스도의 통치가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드러나고 가시화되는 은혜가 보편교회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일을 위해 교회를 위한 제도와 직분들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과 참 신앙고백과 선하고 덕스러운 질서에 근거해 사역하므로,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치하시는 복이 보편교회에 가득하기를 또한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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