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묵상

경문 띠를 넓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노가 없는 배 2024. 5. 7. 09:24

by 박동근 목사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23:5)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행태를 책망하시면서, 그들이 경문의 띠를 넓게 하는 것에 대해 지적하셨습니다. 경문(phylactery)은 율법이 기록된 양피지 쪽지를 보관하는 작은 상자 혹은 가죽함 혹은 캡슐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경문 안에 보관된 말씀들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속하신 중요한 사건과 명령들 그리고 약속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주로 출애굽기 13:9, 16절과 신명기 11:18절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전토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남겨져 내려옵니다.

 

경문은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이마와 왼팔, 곧 심장에 가까운 곳에 끈으로 매었습니다. 이들은 경문을 달고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순종한다는 신앙을 나타내었습니다. 원래 경문을 달고 기도하는 행위는 그 정신으로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에 감사를 드리며, 그 감사하는 마음을 율법의 준수로 나타내려는데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정신은 망각되고 자신의 신앙을 과시하거나 미신적인 의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경문의 띠를 넓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경문을 다는 띠를 넓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경문의 띠를 넓혀, 경문을 달고 있는 모습 자체로 자신이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며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고자 했습니다. 경문을 달고 기도하는 일이 본연의 정신을 망각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치장으로 전락할 때, 그들의 기도는 외식행위로 전락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사의 응답으로서 순종은 희미해져 가고 경문의 띠만 넓혀져 갔습니다.

 

한편 미신적인 사람들은 경문이 해악과 위험, 특히 귀신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처럼 의지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담은 경문이 미신화된 것입니다.

 

경문의 띠는 넓어지고 경문을 다는 일에 열심히 더해졌지만, 이들의 신앙은 부패했고,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와 같은 정신은 퇴락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과 의미를 상실한 채 의식주의가 피어오르자, 급기야 이들을 지배하던 규례들은 심지어 미신으로 전락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질서와 규례를 말씀의 정신을 담는 그릇과 통로로 삼으십니다. , 말씀과 우리의 교리가 삶의 구체적인 실천과 가시적인 규례 형태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교회의 질서와 규례를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만이 정당하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혹여 성경에 직접 명령되지 않은 규례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성경적 예배와 삶을 사는데 유익하고,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 생활하는 데 유익한 것들이 필요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명령과 성경의 명령을 믿고 따르는데 그것이 유익한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성경에 근거한 성경적으로 유익한 규례와 질서들이 존재하고, 한편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성경적으로 해로운 규례와 질서들도 존재했습니다. , 이런 규례들은 성경과 상관없는 철저히 인간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온 규례와 질서들이라 할 수 있고, 이런 대표적인 예가 중세 로마교회의 규례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규례와 질서가 성경에서 온 것이라하더라도, 교회가 그 의미와 정신을 분명히 가르치고, 인식하여 가시적인 규례와 질서가 보이지 않는 가치와 정신을 구현해 낼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과 질서 그리고 규례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정신이 어떠한 질서와 규례와 같은 가시적 결과를 구현해 내기 때문입니다. 육체와 영혼의 관계가 그러하듯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과 정신은 언제나 가시적 교회의 형태로, 가시적 규례와 질서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본연의 정신을 상실하고 의미와 내용을 상실할 때, 규례는 의식화되고 미신화되고 맙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샤머니즘과 미신에 빠져 하나님을 향한 배도적인 죄를 범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의 정신을 상실하여 그것을 의식화하고 미신화할 때, 그 패해가 큰 것입니다. 이러한 행태가 만연해져 가면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와 질서를 의식화하고 미신화하는 것을 넘어, 부패한 자신들의 본성과 필요를 따라 성경과 무관한 질서와 규례를 고안해 내기까지 합니다. 중세 로마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과 신앙고백이 온전히 선포되고 가르쳐지지 않는 현대교회의 현실 가운데, 로마교회의 망령이 되살아 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성찰하게 됩니다.

 

언제나 교회는 말씀과 신앙고백의 순수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과 신앙고백이 가시적인 예배와 삶의 질서와 규례의 형태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질서와 규례는 언제나 말씀과 신앙고백의 결과여야 하며, 양자가 일관되게 하나여야 합니다. 순전하고 거룩한 영혼과 육체가 연합하여 한 인격의 예배와 삶을 이루듯, 말씀의 정신이 가시적인 교회와 가시적인 교회의 질서로 구현되어야 합니다.